성경이 말씀하시는 이방인은 혈통으로 이방인이 아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이든 갈대아든 명명된 이방인이라고 해서 그 민족이 무엇인지 그 혈통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방인(異邦人)은 나라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나라는 통치하는 의가 있다. 민주주의가 있고 사회주의 또 공산주의가 있다. 전제주의 국가는 임금이 곧 의의 본체였다. 즉 이방인이라는 것은 결국 의()가 다른 사람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유대인이든, 다윗의 자손이든, 목사든, 교황이든 다 이방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와 다른 의를 따르면 다 이방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박국에서 말하는 이방인 역시 그렇다. 이는 성경에 지칭된 이방인이 역사적으로나 혈통적으로 어떤 민족이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을 받는 사람이나 심판하는 사람이나 모두 이방인일 뿐이다.

 

이방인의 정의가 하나님의 심판, 그것도 이방인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판에서 중요한 것은 심판 받는 사람이나 심판 하는 사람이나(세상이나) 모두 이방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순종되지 않았다면 예외 없이 모두 이방인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모든 이방인들은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 이것을 흔한 말로 파이가 같다.”라고 한다. 먹을 것, 곧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같다는 의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방인을 동원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본질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방인인 자들 중에서 더 높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서로 심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이미 고난이다. 굳이 하나님께서 능동적인 심판을 행하시지 않아도 자신이 속한 세상의 의에 역행하는 것이 바로 심판이다. 사람들이 인생을 ()’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는 자체가 심판이고, 스스로 인생을 고난이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 역행하는 심판 가운데 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것이나, 이방인은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무한루프 같은 세상의 속사정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와 다르게 높아지려는 것에 의와 가치를 두고 있는 세상이자 그 속에 속한 모든 이방인들은 동일하게 높은 곳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며 또 스스로를 괴로운 삶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째서 이방이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수행하느냐는 하박국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한 이방 역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의 본질이다.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2:8)

 

그러므로 하박국에 나오는 이 말씀의 흐름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본성이 아니라면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줄로 알고,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일장춘몽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망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높은 곳에 이르기를, 더 높아져서 육신이 평안해지기를 하나님께 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게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과 의가 다르므로 이방인이고,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높은 자리를 구하니 그것을 갈구하는 또 다른 이방인들에게 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을 개독교라 부르며 희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역시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으니 악하지 않고 선한 방법으로, 선한 삶의 양식으로 이기려 한다며 자신들을 변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일 뿐 추구하는 것이 같으면 모두 같은 가치관과 같은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전혀 다른 의로움이라는 것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마음이나, 화려하고 귀한 자재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모두 이방인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세상의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으로나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 생각해보면 십자가는 세상과의 충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기독교가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세습에 대한 아전인수적인 생을 가지는 것이나,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과 같은 것은 세상과의 충돌이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상과 동일한 파이를 두고 다투고 있음을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무늬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종교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가치를 취해보려는 속내를 가진 집단이다.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한 범죄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도구이자 형식을 가진 존재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이라는 형식의 안녕과 복락 그리고 성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답시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가장 나쁜 이방인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늘 세상의 심판을 받는다. 세상의 도전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모습을 일일이 세상에 설명하고 있다. 설명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들의 심판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지친 나머지 늘 세상은 악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이 해이하게 만들고 공의를 시행하지 않는 이들을 세상 곧 이방의 세력으로 심판하시는 모습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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