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21-27) 이른 비와 늦은 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7. 09:57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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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아주 평범하고 변함없는 진리다. 육신의 문제, 평안이나 사업의 성공, 건강과 같은 것이 좋아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신 것이라 여기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심은 것은 육신의 일이다.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했고, 육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노하게도 기쁘게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은 신앙의 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다. 은혜나 회복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의 모든 문제를 눈에 보이는 육신을 기준으로, 육신의 문제로 본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기 때문이다. 회복과 회개를 육신의 문제를 보는 사람은 영원함도 그것을 기준으로 본다.


그래서 죽어서 천국에 가면 세상에서 귀한 것으로 여기던 것들로 보상을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그 보상 받은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결국 육신으로 사는 동안은 물론 죽어서도 이 육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한 가치로 보는 신앙이다.


문제는 하나님도 그렇게 보시면 괜찮은데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 메뚜기 떼로 비유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육신과 세상에 대한 가치를 재앙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안에는 하나님의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없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치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신다고 하는 말씀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자기 가치관 안에서 그 말씀을 해석한다는 뜻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즉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결국 육신의 문제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교회에 가서, 기독교 방송이나 채널에서 듣는 목사들의 설교가 뻔히 이것임데도 구분하지도 못하고, 설사 얼마 간 구분한다고 해도 자신 역시 육신의 문제를 귀한 가치로 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육신의 문제 해결의 적절한 때에 사람들이 은혜라 생각하는 조치를 하나님께서 취하신다는 것이 아님에도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면 ‘시온의 자녀들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바로 그런 이들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가치의 근본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들에게 가치는 하나님의 가치와 같다. 그 의는 다름 아닌 십자가다. 십자가는 메뚜기 떼와 같은 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반대에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로 예수님이 심판을 받아 낮은 자리로 간 사건이다.


육신의 일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가치,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잘 되는 것이라고, 귀한 것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하고 싶은 그들의 가치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치나 의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그 비로 인하여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잘 되어 기뻐하기를 바라실 리가 없다. 그 딴 것은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것을 학문으로, 신의 학문이라고 만들고, 그것을 이수했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팔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려 스스로 종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이다. 메뚜기 재앙이고, 자기 인생의 재앙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재앙으로 알고 예수님께서 가신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을 위하여 적절한 비와 같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심을 요엘이 말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