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1-11) 세례 같은 여호와의 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2. 08:41 Writer : 김홍덕

메뚜기 재앙은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가는 신앙이 가져온 영적 소멸이다. 높아지고 이기는 것을 선과 성공으로 삼는 사람들의 수가 절대적이기에 메뚜기 떼로 비유되고, 그들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여기는 열매와 소산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며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신앙이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제사가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메뚜기 재앙이다.


이 메뚜기 재앙이 의미하는 것, 곧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사실 늘 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 임하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 중에 있는 일이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영광과 은혜로 믿는 대중적이고 보편적 신앙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거듭난 사람은 온전하며, 죄가 없고, 예수님은 형제라, 같은 생명이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음에도, 거듭 났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을 정설로 믿고,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양심을 가졌지만 다들(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 매일매일 경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로 위안 삼아 보지만 조금만 양심이 있으면 그것은 열매와 제사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며 왔는데 그 안에 열매가 없음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모든 빛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의지한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세상의 종말과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구하던 모든 것이 메뚜기 떼가 다 먹어 치운 재앙 같이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이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슬퍼하라고 명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하는 것을 좇았지만 그 안에는 열매도 제사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진실했다면 하나님께서 슬퍼하라고 하시지 않아도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세계의 종말과 같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고, 창조주며 주관자인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하나님이 열매로 여기시는 것과 제사로 여기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은 세상이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고, 성경의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이것이다. 따라서 요엘서의 어둡고 캄캄한 날 역시 그 종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 더 많은 사람이면 더 옳다는 것을 좇았는데 그 속에 과실과 포도주와 기름이 없다는 것이 메뚜기 재앙이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메뚜기 재앙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부인하거나, 더 열심히 하려 하지 않고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의 신앙이 열매도, 그리스도라는 포도주와 기름도, 제사도 없는 신앙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의지하던 것의 종말을 맞이하는 어둡고 캄캄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종말을 맞이하는 경험이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는 은혜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좇았는데 그 안에 열매가 없고 제사도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 재앙이고, 그것이 재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 세계가 무너지고 자기 세계의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한 빛, 곧 해와 달이 어두워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날이 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반전은 요엘서만의 말씀도 아니다. 성경 전반이 그렇고, 창세기, 곧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될 때도 그랬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의 세계는 흑암과 혼돈 가운데서 시작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의 이런 여정을 아주 많이, 그리고 때론 아주 깊게 다루고 있다. 가장 먼저는 창세기 1장 2절, 곧 하나님 세계의 시작이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의 여정에서도 요단강 앞에서 실망하는 것이 그것을 예표하고, 많은 성경에서 하늘의 해가 어두워지는 일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언급하심이 그러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것이 시작”이라고 하신 것이 확정적이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23:24-26)


그리고 이런 여정의 깊이를 욥을 통해서, 또 십자가로 가겠다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극심한 갈등을 통해서 심도 있게 말씀하시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볼 때 사람은 자기가 의로 여기고, 자기 기준으로, 또 세상의 다수가 가진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던 세계가 어두워지고 캄캄해지는 종말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의 날과 하나님의 세계를 온전히 만날 수 없다. 즉 자기 의와 자기 가치관이 다 처리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뼈대 중 하나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의 여정이다. 끊임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던 마음을 모두 광야에서 처리하고서야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예식으로 나타난 것이 세례다. 죽고서 다시 사는 것을 예표하는 세례는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라는 말이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은 세례와 같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려면,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려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여 낮은 곳으로 가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나는 제사가 없는 신앙은 사람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인정하면 어둡고 캄캄한 날이 되겠지만 물에서 나오면 거듭난 생명이 되듯 그 어둡고 캄캄한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한 것이라는 것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한다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특히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내용이 피라미드의 위로 가는 것, 많고 크고 이기고 위대한 것을 좇는 것이라면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다고 해도 그 결말은 메뚜기 재앙과 같이 열매도 제사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호와의 날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캄캄할 뿐 아니라 큰 군대의 침략과 같이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갈 것 같은 괴로움이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의지하고 의로 여겼던 것이 재앙이었음을 알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은 회개로 이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난 날 자신이 메뚜기 떼와 같은 것을 좇아 재앙과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므로 만나는 여호와의 날들로 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