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 성령의 능력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26. 21:47 Writer : 김홍덕

성령의 능력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개념에 가깝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세상에 없는 것이므로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니고데모다.(요 3장)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어떻게 나이 들어서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는데, 이는 니고데모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없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생각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 불치병을 고치거나, 망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 전혀 알 수 없는 도움으로 회생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언이나 신유, 예언, 환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령의 능력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문자적 의미로서만 맞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가 성경과 다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것, 곧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피조물인 사람이 스스로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이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 목적,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존재에서 알게 되는 것이 사람으로 변한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이렇게 변한 사람,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의 삶의 목적이자 본성이 된 사람을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 즉 생명이 있는 존재로 보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도대로 된 사람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글에서 목적적 관점에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


성령의 능력을 이와 같이 사람이 피조물이기에 스스로 알 수 없는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일컫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성령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즉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육신으로 행할 수 없는 현상과 능력과 신비를 성령의 능력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모른다는 말이고, 성령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니 구원도 거듭남도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오해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육신은 눈에 보이지만 육신의 존재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왜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목적 없이 존재하게 되는 실존은 없다. 사람이 목적 없이 만드는 물건이나 형성시키는 이론이나 생각이 있는가?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기 육신의 존재 목적은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본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것을 그것을 기준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영광은 모두 육신의 일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믿고 이해한다. 그래서 육신이 평안하면 복을 받았다 여기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 생각하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고 육신이 바라는 바가 뜻대로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런 신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성령의 능력 역시 그런 문제를 기적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볼 뿐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것임을 생각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그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갈등을 겪은 제자들의 변화로 나타났다. 그 뿐 아니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전환되는 바울 사도의 갈등도 성령을 인함이라는 것을 8장에서 밝히 말씀하고 있다. 욥도 같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인하여 자신이 겪는 것과 같이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아는 욥의 인생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죽을 만큼 힘들어 했던 자신의 모든 푸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 역시 베드로와 제자들 그리고 바울 사도에게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궤를 같이 한다. 



성령을 인한 변화들

 하나님을 아는데 왜 육신의 삶은 곤고한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육신의 삶을
 평안과 축복으로 변화시킨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베드로와 제자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면
 높임을 받아야 하는데
 왜 낮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가?

 예수님이 보이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였구나!

 바울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데
 왜 육신은 죄와 사망의 법인
 세상의 법에 종속되는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세상의 법과 무관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런 모든 성경의 일들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 역시 성령으로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하기에 성경으로 전해 주신 것이다. 오늘, 아니 어느 시대라도 성경을 통해서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그 말씀을 믿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힘이나 생각이나 철학이나 신앙이나 믿음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의 목적을 깨달은 이전과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다. 그 의와 뜻은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가지신 변치 않는 것이며, 사람을 향한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셨다는 것, 성령 체험이라 또 성령 강림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 열심히 했더니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본질적 능력은 사람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이 되는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존재의 표상은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다. 즉 순종하므로 심령에 심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잉태시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정리해보면 성령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그 의도대로 듣고 순종한 사람 안에 있는 듣고 순종한 말씀과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본성이 되도록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며, 성령의 능력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생명과 본성이 되도록 변화, 곧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조건이 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의도대로 심령에 심긴 사람, 즉 순종된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라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순종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하나님 아들은 낮아지는 존재며, 세상 가치로 높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며,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 역시 높은 존재라는 사람들의 의 앞에 죄인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본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이 순종되어 있어야만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의 능력을 기적으로 안다. 다시 한 번 설명하는 것으로 기적은 성령이 오시므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성령 강림의 본질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그렇게 알고 있다면,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순종된 사람의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을 거듭난 사람이라 뇌까려도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태초 이래로 변한 적이 없다. 그 법대로가 아니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