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성령께서는 삶의 형편과 질과 같은 형식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정확히 성령의 직임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께서는 삶의 목적,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시킨다. 평생을 살아도 왜 사는지 알지 못하고, 어느 날 철들어서 보니 사람으로 살게 된 자신을 보존하고, 육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귀하다는 것을 무작정 좇으면서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매일을 살다 또 다른 어느 날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모른 체 죽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비참하고 어두운 삶을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으로 바꾸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정하신 것이고, 그 정하신 뜻이 육신이 되면 어떤 모습인지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의 심령에 심긴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그 사람의 육신이 되게 하셔서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생명 있는 삶이 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의 임금보다 더 높은 존재’이므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지 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이 성령이 오시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는 말씀은 정말로 온전한 것이다. 다만 이 온전함이 오늘 이 시대의 사람의 것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그 제자들의 일을 전하신 것은 우리 역시 제자들의 그 변화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분명하다.


제자들에게 어느 날 완전히 낯선 모습이 되신 예수님이 성령이 오시므로 예수님의 그 모습이 이해되는 것을 넘어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신 일을 보이신 것은 오늘 우리 역시 그렇게 되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제자들의 그 변화가 없는 삶이라면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이라는 의미다. 방언을 받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살고 있는 자기 삶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가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에 순종하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본질이 아니라고 다짐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자신을 다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짐하고 다그치며 금욕적인 절제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 가치를 안다는 의미다. 알고 있지만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과, 그것이 가치 없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게 바로 생명의 차이다.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생명은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가치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처음 생각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아들은 세상에서 높고 지배적인 존재라는 가치관에 심판 받아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가장 귀하고 의로운 것으로 보시는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듭나게 한 사람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그 가치관과 같다. 그게 정상이고 상식이며 선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바뀌었다는 것이고, 생명이 바뀌었다면 그 바뀐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 본성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본성이 바뀌었는데 세상의 가치를 참고 견디고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생명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굳이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본성이다. 


그러니까 유혹을 이기려 기도하고 노력하는 신앙은 거듭나지 않은 신앙이다. 하나님과 가치관이 다른 존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인정하지 않는 존재다. 그것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분명한 생명의 법, 생명으로 났다면 굳이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에 순종되지 않는다면 교회를 다니던 목사든 아무 상관없다. 구원도 생명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망도 없다. 생명의 본성으로 볼 때 자신은 노력하는 생명 없는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말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과 같이 처절하고 간절한 회개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성령을 받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자기 생명 본성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Have to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는 존재가 존재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 의미 없다.


성령, 예수님의 제자들을 변화시킨 그 성령을 받으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 있다. 예수님과 같이 원래부터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제자들과 같은 갈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 살았는데, 그 가치에 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보다 귀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인정하려 한다는 것은 우리가 육신 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심히 낯설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인생의 형편이 달라지지 않는지를 인하여 미치도록 갈등하고, 하나님을 미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데 왜 세상의 법이 항상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패자로 만들어 초라하고 심지어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몰라 잠 못 이룬 밤이 없었는데 성령을 마주할 수는 없다. 성령은 바로 그런 갈등을 해소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치지만 그런 갈등조차 없다면 성령께서 알게 하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다는 의미다. 즉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할 것이 그 속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조차 모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삶이 어떤 형편과 모양이라도 그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자기 삶에 문제가 있어 개선해야 하고 더 나아질 것이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자기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증거다. 그것은 만족이 없는 것이다. 에덴동산(만족의 동산)에서 쫓겨 난 사람이라는 증거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이 없다는 존재다. 오늘 자신이 그렇다면 자신이 죄와 사망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어두운 사람이라는 고백부터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