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2) - 제자들은 왜 믿지 못했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3. 28. 04:00 Writer : 김홍덕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번째로 깊이 묵상해 봐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는가?’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두고 오늘날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타산지석으로 삼으려 든다. 자신들은 쉽게 부활을 믿는데 제자들은 믿지 못했을까?’라는 관점으로 쉽게 본다는 점을 묵상해 봐야 한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이 비록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다고 하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제자들보다 나은 신앙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다.

 

신앙을 어떤 면으로 비교해도 그날의 제자들에 비하여 오늘 자신의 신앙이 미치지 못하는데 제자들이 믿지 못함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과감한 무례를 범해도 되는지, 역설적으로 그런 제자들이 믿지 못하는 부활을 죽음과 안식이라는 절대적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쉽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부활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느냐는 세례 문답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얻을 있는 것으로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로움이 자기 본성이 되면 부활은 너무 쉬운 것이지만 문제는 앞서 설명한 부활의 절대적 조건으로서의 죽음과 안식이 자신의 일이었음을 부인할 없을 정도로 확실해야 한다.

 

특히 부활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죽기 전과 후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신이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 자신도 언제인지 모르지만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기 전과 전혀 다른 생명이 되었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 교회에 다니기 , 부활을 믿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이나 육신의 능력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추구하던 것을 죽고 다음, 거듭난 다음에 구하지 않느냐 돌아보면 있다.

 

부활을 믿기 전에도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구했고, 부활을 믿는다는 지금도 동일한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죽음 전과 후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은 부활의 절대적 전제 조건인 죽음도 아니고 거듭남도 아니며 부활 신앙 역시 거짓이다. 구하는 것이 동일한데 단지 주시는 이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꾸었다고 죽음으로 전혀 다른 생명이 것이라고 수는 없다.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이라는 풍요와 다산을 주시는 신은(신도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도모하는 일의 성취와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며, 화려하게 건축된 건축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영광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믿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며, 그들이 말하는 죽음과 거듭남은 죽고 새로 것이 아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시는 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신앙 안에 있는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후에 구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기도 제목이 동일하다는 ) 그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그런 신앙에 부활이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믿겠지만 호박에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활을 쉽게 여기는 것은 자신들이 부활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모르는 것은 쉽게 여긴다. 프로 운동선수들의 경기 실수를 보고 먹고 그것만 하면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냐?’ 비난하는 것은 운동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기에 쉽게 하는 소리인 것과 같다.

 

운동을 아는 사람은 프로선수, 운동이 자기 직업이자 그대로 먹고 그것만 하는 선수들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운동에 재능이 있어 프로 선수가 되었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먹고 그것만 해도 어려운 것이라고 본다. 자기 안에 진정한 부활 신앙이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과 같은 때가 자신 안에 있었기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가볍지 않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두고 오늘 우리는 도마와 같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은 정말로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부활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안에 부활이 없다는 증거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부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 죽음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진정으로 믿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므로 부활이 자신의 것이 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목욕한 라고도 하셨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하나님께 영화롭게 자들이라고 사람들인데 ? 어떤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원초적으로 부재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제자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예수님의 책망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에서 확인할 있다. 차이는 단지 성령의 임하심뿐이다.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나서는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던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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