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가치와 포지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3. 16. 14:54 Writer : 김홍덕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많이 부르는 찬양 가사다. 성경말씀 곧 복음은 가사 그대로 세상 가장 귀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치를 부여하는 기준이다. 어떤 가치 기준에 의해 복음이 귀한 것이냐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는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생각하거나 간과한다. 복음이 귀한 이유는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세상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그런 상태라면 구원이 없는 것일 수 있고, 아니라면 최소한 믿음이 장성하지 못한 어린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늘 알고 있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늘 비판하는 교회보다 신앙의 깊이가 더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고 복음에 대한 깊은 고찰과 나눔이 있는 공동체로 갈수록 복음이 가치를 더 높이 보고 있다는 점이다. 더 사모하고, 더 놀라운 것을 보고 깨닫고 나누기에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귀함의 가치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의 가치가 온전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성경말씀과 복음을 생각하는 프레임을 도식화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그림은 보는 그대로와 같이 피라미드 모양이다. 높이 올라가면 이긴 자가 되고 높이 올라가면 영광스럽고 그 아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구조인데 많은 기독교인들, 그 중에서 복음을 귀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일수록 저런 구조를 집착한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상당한 사람들이 복음이 세상의 모든 학문과 도덕과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들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신앙인들이 복음을 적선하듯이 전도하고, 교회의 일에 대하여 세상이 간섭하려 하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이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선을 긋는 것도 복음의 가치를 피라미드 꼭대기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피라미드의 구조는 지극히 세상적인 구조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을 도모하는 것도 이것과 궤를 같이 한다. 세상적 가치로 높고 귀하고 좋은 것을 신앙인이나 교회가 얻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굳게 믿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는 세상의 것들과 세상의 기준으로 높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질만 바로 알아도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죄인 사형수가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낮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 복음이 가치, 하나님의 의의 가치는 세상적인 기준과 같이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에 있다.

 

복음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원이자 뿌리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복음의 가치는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복음이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가치관이다. 복음이 귀한 것은 모든 것의 원리이자 근본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

 

이것을 알지 못하면 신앙을 가졌다는 자긍심 아닌 자긍심으로 교만해지고 복음의 가치를 뒤집게 된다. 신앙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아래에 있어야 할 뿌리를 뒤집어 꼭대기로 가져간 가치관은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보다 복음이 우선이다’,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는 가족은 떠나는 것이 좋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렇다면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이끄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란 의미며, 그 사람의 모든 가치관과 삶을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실수도 않으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의 것을 부인하고 멸시하는 것이 정상적인가? 그럴 수 없다. 또 예수만 믿으면 가족도 버리고, 세상의 도덕도 무시하면서 사는 것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의 근원이다. 오히려 그것을 온전케 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것과 어린 예수님께서 자라시면서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라. 군병들이 잡으러 왔을 때 충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세상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예수를, 또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것을 세상의 가치로 피라미드 꼭대기에 두지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치를 부여한 것의 진정한 가치를, 그 가치의 근원을 알게 하기 위하여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

 

복음이란 너무 너무 귀한데, 그 귀한 것을 까 보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더라!”라는 것이 깨우쳐져야 비로소 거듭난 사람이고 진정으로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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