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2:6-13) 행위 신앙의 저항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8. 11. 09:28 Writer : 김홍덕

교회세습에 관하여 ‘된다.’, ‘안 된다.’며 난리도 아니게 싸우고 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하지만 결국은 세습이 성사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냐? 아닙니다. 또 반대하는 쪽이 옳은 것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어차피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 단지 <어떻게 하는 것(Do)>의 차이로 가지고 이것이 옳다, 아니다 라며 싸우고 저항하는 것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신앙인들, 성경을 읽고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행동하는 양심이며 좋은 신앙인지를 가늠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을 공부한 신학자가 필요한 신앙인들, 단지 자신들이 예수님 오신 이후에 산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복음적인 신앙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 신앙의 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머릿수입니다.


머릿수에 의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가늠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통적인 신앙이라 말하는 것은 보편적 기준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통신앙인들이 이단이라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 그 행실의 일부가 아닌 전반이 칭찬 받을 만한 삶들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보편적 상식이 정통성의 근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머릿수가 정통성이 될 수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신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세상보다 기독교인들이 작으니 그것이 작은 문이라고 착각하기도 함) 그 정통 신앙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에 갔다 와서 하는 말들의 상당수가 교회에 대하여, 설교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도 만족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 수에 의지하는 웃기는 짓거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식적은 모순 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안목의 정욕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육신의 평안을 바라고 그것을 하나님께 얻고자 하니 육신의 정욕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행여 그렇게 성공하면 교회를 크게 짓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성공’이라며 자랑합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신앙의 근간이 육신의 삶에 있기 때문에 육신의 삶에 어떤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악착같이 성경을 제대로 지키려고 하는 이유도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은 자신들이 육신으로 살면서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거꾸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신이 의지하지 않은 체로 왔다가 소비되어 죽는 것인데, 그 삶을 보존하고, 그 삶 속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복된 삶이라고 여긴다는 것 만한 어리석음과 어두움과 모순이 없건만 오히려 인생이 나고 소비되어 죽는 것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힘까지 빌려서 육신의 삶을 풍족케 하려고 성경을 지켜 행하려 하는 허망함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이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소리 하자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말이 미가의 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미가의 때 뿐 아니라 모든 선지자의 때와 심지어 예수님의 때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봐라!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복을 받고 잘 사는지!’라고 말입니다. 


그 성공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인함일까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 뜻을 전하라고 보낸 아들은 왜 세상에서 왕이 되게 하지 않고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이렇듯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세상의 성공이 아닌 것인 것만 알아도 자기 신앙을 돌아보게 될 것인데 오히려 세상에서 죄인이 돼서 처형을 당한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빌고 있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교만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의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에 그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 여기기에 하나님께 그것을 바랍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수가 많고, 교회에 예배드리고 오는 차 안에서부터 목사와 교회 비판을 하면서도 그 수가 많다는 그것에 의지하여 자기 신앙이 옳다고 여기고 신앙에 대하여 묵상하고 ‘과연 그런가?’하며 반추하고 자신들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예언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정체성을 이야기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다가는 육신으로 사는 동안 재앙을 맞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고한 자신이 옳고, 언젠가는 자기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그 말 한 마디가 하고 싶어서 스스로도 곤고하다고 여기는 인생의 어두움에서 상처뿐인 처절한 노력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노력을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려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라고 미화합니다. 그 말이 하나님은 사람을 살 동안 완전해지는 미완의 존재로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좋았다.’며 안식한 철없는 신으로 모욕하는 것임은 전혀 모른 체 말입니다. 그렇게 깜깜하고 어두움 중에서도 자신이 어둡다고 인정하지 않는 그 하나를 인하여 인생은 여전히 곤고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히 11장),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성공이 아닌 실패 중의 실패자인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말씀마저도 자기 뜻대로 보면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말도 하지 말라고 지금도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봐도 미가서가 옛날 책이 아니며, 예수님 오신 이후 시대를 산다고 신약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며, 미가서 또한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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