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1장) 사마리아 같은 오늘날의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8. 4. 08:50 Writer : 김홍덕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앗수르는 강제적인 혼혈 정책을 시행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어떤 행위 규범을 범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일희일비하시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행위란 생명의 본성에 수반된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초래된 결과는 어떤 행위를 인함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 존재의 본성대로 행하였거나,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결과인 것입니다. 즉 사마리아 지방이 강제적인 혼혈 정책을 당했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정한 것과 세상의 것이 섞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 맞는 경영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혈정책 아래 놓인 것은 그들이 성적인 문란을 인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간음한 자가 된 것은 성적인 간음이 아니라 정체성의 간음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존재가 그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아닌 다른 것과 짝을 맺는 것이 정체성의 간음입니다. 성적인 간음은 그렇게 정체성의 간음을 행하는 존재가 보이는 하나의 형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혼혈정책을 시행하는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여 혼혈 정책 아래 놓였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을 버리고 다른 것을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배필로 삼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의로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가 혼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 삶의 전반은 율법을 기반으로 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그들이 삶의 전반에서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것을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가치관을 혼용하였다는 것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능동적인 심판을 하시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 때에 이방인들이 쳐들어오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이나 사람들을 난데없이 심판해서 벌을 주거나 하시는 것은 성경에 흔치 않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그 삶 자체가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조그마한 잘못에도 일일이 참견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그 삶의 양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준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쉰다거나 십일조를 하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이 앞에 범죄 했다고 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추출해내고 다른 것으로 치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삶과 세상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삶이 혼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정체성의 간음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사실 지금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큰 교회>에도 같은 모습입니다. 아니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일요일이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결국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복이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혼용되어 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생활양식 안에는 ‘그러면 벌 받는다.’는 식의 말과 관념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 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가치관은 무당의 샤머니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샤머니즘에 불과한 신앙입니다. 물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누이 언급하였듯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육신에 어떤 벌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어떤 행동을 언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여기시는, 창조의 목적에 맞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십일조 하면 부자 된다.’, ‘기도 안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스스럼없이 설교하며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불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성경공부를 하고, 또 기도하여 그런 화를 면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공했다는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도우시도록 기독교적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그런 생각들이 모여서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수십억 하는 음향기기와 영상기기를 갖추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격에 맞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꾸미려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좋게 여기는 것을 교회와 신앙 안으로 끌어 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음이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쳤던 하나님 앞에 범한 죄인데 오늘날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단지 예수님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 하나 만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은 전혀 구약 시대의 책망에서 무관한 것과 같이 구약을 바라봅니다.


물론 때로 구약의 말씀을 오늘 자신들에게 반추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행위에 대하여 반추할 뿐 자기 정체성, 자신들이 하나님께 창조되어 하나님 앞에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에 기인하여 반추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간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로 우리 옆에 앗수르가 침략한 이유가 상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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