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구성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다는 것임을 먼저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세상에 어떤 부분은 하나님이 주관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고, 이것을 마귀나 세상이 다스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빠져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계를 적으로 삼고 싸우시며 그 싸움의 대장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어쩌면 난센스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표현 양식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이고, 표현 양식이며, 내용이신 하나님의 형식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시는 최고의 성품은 <사랑>이시니, 이를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존재가 사람이고, 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게 되는 존재를 그리스도라 하시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먼저 하나님의 로고스가 육신이 되게 하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마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들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탄식하며 고통당하면서 까지 고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그리스도의 처음이 되셨으니, 이것은 앞으로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인생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몸소 보이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the Christ)를 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a Christ)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그가 무엇을 보이고자 하셨는지를 알고 그것을 본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 받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끌려갈 때 하늘의 천군천사가 와서 구원한 분이 아니다. 또한 빌라도와 유창한 말로 변론하여 무죄를 입증하신 분도 아니시고, 유대인들 보다 더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신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오히려 그런 것 앞에 죄인이 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흔히들 세상을 이기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 더 유리한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란 듯이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니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정으로 그렇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부자가 되어서, 또 경쟁에서 이긴 자로 무대에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기 에는 너무 초라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기 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는 세상의 성공도,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신 것이다.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세상의 경쟁과 법 앞에서 죄인 되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 되셨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육신으로 죽은 자 가운에서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의 법과 선악의 법으로 볼 때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가 있으면 더 선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 중에 더 영광을 받고 인정을 받는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 되고 결국은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또한 그 처음이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다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죽음을 당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살리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살아 있다.'는 것은 육신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지 아닌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기준이 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을 알기 위하여 산 시계가 가지 않으면 ‘죽었다’하듯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있는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인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노라 하며 금식하고 울부짖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피라미드와 같고, 객관적이며 조직적이다. 더 가진 자가 더 높이 있는 것이다. 목사도 신학이라는 옵션과 종교적 행위인 기도 등을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서서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법으로 심판 받아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가 바로 그 법에 의하여 죽은 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법 아래에서 그 법을 따라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외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의 법이다. 십자가는 피라미드와 같이 올라가야만 의로워지는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고, 죽어 나가야 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문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죽음을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즉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은 다 죽은 것이며, 부활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그 십자가의 의미와 법에 따라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니, 그 법을 좇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사는 세계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시니 세상의 법이 그를 죽인 그 죽음을 먼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운명이고 존재의 목적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에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즉 이 육신의 삶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그 이유로 죽은 죽음을 당할 때 그 죽음에서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삶으로 당하는 죽음, 그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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