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지방에 있던 교회들(이하 갈라디아 교회로 통일)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 들어왔다. 이것을 전해들은 바울은 크게 경계하며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것을 간절하게 설명한다. 바울의 간절함은 자신이라도 다시 가서 이전에 전한 것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1:8)

 

사실 이런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에게 전도를 한 사도이기 때문에 그가 세운 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혈통으로 이방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어떤 유대인들이나 세상의 유력한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가서 복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바울 사도의 많은 서신들 속에는 그렇게 불의하게 교회에 들어온 것에 대한 경계와 그것에 현혹된 자들에 대한 책망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교회가 겪은 문제는 그 시절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한 문제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들 역시 갈라디아 교회가 겪은 율법에 관한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오늘날의 문제는 구약성경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신약성경의 시대는 복음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달력을 기준으로 예수님이 오신 다음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스스로를 복음의 시대,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예수님 육신으로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나타난 것으로만 보면 이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봤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일 뿐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심을 알 수 있다.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오시기 전이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달력의 시간으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성경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다. 당연히 자신이 달력으로 신약시대를 산다고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8:58)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므로 모든 말씀이 복음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2,000년 전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오심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을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것을 예수님의 오심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당연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 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이들에게는 구약 신약 가릴 것 없이 모두 복음이 된다는 의미다. 이는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졌느니라라는 말씀을 세례 요한이 외칠 때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반면 예수님께서 외치실 때는 <복음>이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면 복음이 되고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세계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의 시대를 살려면 달력의 날짜는 무의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게 구원이고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객관적 사실과 시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천지창조가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듯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 역시 내 안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으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오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자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봤다는 것(3:11)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복음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단순한 시대적 개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때가 나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하므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자신이 온전하게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것이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의 사건이 된 이후의 삶을 산다는 의미다. 즉 신약시대를 산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 죄 없는 삶을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삶이라고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스스로를 죄 없다 말하지 못하고 또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며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인데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자신의 것이 되는 예수님의 오심이 자기의 사건이라 말하면서 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자기 신앙에 대한 완벽한 착각이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므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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