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8-25 종과 상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4. 08:21 Writer : 김홍덕

육신의 상전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생활에 있어 도드라지는 모습들을 보이기 일쑤인데, 특히 주일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입사과정에서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 사람을 소개하면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 다니느냐?'를 묻기도 한다. 회사의 형편에 따라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의 사람들, 더 나아가서 기업은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육신의 상전이다. 물론 예전처럼 노비나 종과 같이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돈에 관해서 종속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돈은 세상의 대부분의 가치의 대용 특성이다. 돈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세상을 본질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삶의 목표가 돈에 맞춰져 있다. 아닌 척 해도 두어 가지만 따지면 사람들은 다 그런 면이 다 드러난다. 즉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는 상실한 체 세상이 본질이라고 알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 때로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삶이 공허해지는 것은 그때가 되면 돈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기 때문이다.


그렇듯 본질이자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는 없이 세상이 본질로 알고 살아가는 세계를 육신에 관한 세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6장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즉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기 때문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신 것인데, 이는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세상의 아름다움, 세상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즉 육신, 세상, 육체와 같은 것은 내용이 없는 형식, 곧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안에 없는 사회 조직체와 또한 사람을 성경에서 일컬을 때 세상 혹은 육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날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신앙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을 경시하고 무조건적으로 죄악시 하면서 배척하고 단절하며 분리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렇게 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의 상전들, 그러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과 사람의 존재 이유와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사회 안에서 어떤 매개체에 있어 상전으로 섬겨야 할 때 순종하고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신앙인에 있어 가장 완정된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다른 교회와 달리 아주 복음에 대하여 서로 상고함과 나눔이 풍성한 공동체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를 보았는데, 아쉽게도 이런 점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세상은 종살이'라고 하면서 세상일은 대충하고 삶의 모든 역량을 교회 생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삶의 모든 역량은 교회와 신앙생활에 집중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명을 가진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체제나 형식에 무관하게 모이고 그 삶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교처럼 산 속에 모으신 것이 아니라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실수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목적을 바울 사도가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모든 세상, 이 모든 사회가 다 주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세상에서 죄인 되는 것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신앙의 방점과도 같은 것이다. 영화 <밀양>에는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유괴범이 아이의 엄마가 정말로 큰 용기를 내서 그 죄를 용서해 주려고 교도소에 왔을 때, '나는 이제 용서 받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 알고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만약에 그 유괴범이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서 먼저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엄마에게 가서 엄마가 설사 자신을 죽일지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그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사죄하고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고 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바른 신앙의 모습인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교회를 세습하기도 한다.(이게 정말로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세습에는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을 것이다. 교회라고 목사의 아들이 목회를 이어 받는 것 자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명분은 세상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만약 얻지 못한다면 그 명분이 교회적으로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이 신앙과 교회를 위해서 사람을 버린다. 즉 사람의 마음들을 버리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를 얻지 못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교회를 얻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용서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세상에서 가장 밝히 아는 분이셨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모독한다고 십자가를 지셨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도고, 위에 것을 생각하는 신앙이고, 그리스도와 같은, 또 본받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늘 죄인이다.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에서 보면 늘 죄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일요일에 나와서 일하는데 교회 간다고 회사에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회사 동료들에게 죄(빚)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미안해하고 또 월요일이나 다른 날에 더 열심히 해서 동료들이 행여 일요일에 교회에 간다고 빠지더라도 인정해 줄 수 있는 빚 갚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일요일에 교회 간다고 회사에 오지 않는 것을 비난한다고 속으로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들'이라면 스스로 위로하고 심판하는 높은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는 것을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복음이 펼쳐지고 그려져야 하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고, 형식인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모든 사람들과 세상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목적을 채워야 하는 빈 그릇이고, 위에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것을 채워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마음으로 조차차도 멀어지면 안 된다.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은 신앙의 순도를 높이고 신실한 신앙 같지만 그것은 구분되는 거룩함과는 다른 것이다. 거룩함이라 바닷물 속에 사는 고기가 짜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세상 안에 있지만 형식이 전부라고 아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그 감동이 바로 성령의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께 하듯 하는 삶,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으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자녀를 낙심시키지 않고, 세상의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는 이 모든 것은 다 훈련이나 신념으로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도만 알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면 다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도는 생명이고 생명은 그 본성을 표현하는 양식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의에게 심판을 받고 죄인이 되는 것이지, "예수 천당" 외치는 투철함이나, 세상의 것을 멀리하는 신실함(?)이 아니다. 신앙이란 항상 계시가 밝은 사람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수고하고 희생하고 죄인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즉 이것 없이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니요, 큰 교회를 지어놓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도, 남편이나 아내 부모와 자녀 앞에서 더 신앙 있고 더 아는 것을 상대에게 나타내고 드러내고 가르친다 해도 아무 것도 아니요, 세상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규정하는 것도 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런 말씀, 곧 어떻게 보면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지침과 같은 말씀을 하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며 보이신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생명이 나타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그 생명을 가진 사람도 가정과 사회와 신앙에 까지 다른 사람에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신실한 신앙이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표현해 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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