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죄를 깨닫게' + 3

(갈 3:15-22)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29. 09:55 Writer : 김홍덕

일반적으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라는 말씀은 운전하기 전에 기도같은 신앙의 일상적 측면보다 체감적인 신앙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은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거듭남과 구원이라는 신앙의 핵심적 문제에 직결된다. 구원은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죄를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을 만났다는 의미다.

 

죄를 고백하고 시인하려면 자신이 죄 가운데 있음을 어떻게든 깨닫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데 알 법은 없다. 율법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수 있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한다. 율법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당연히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달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을 분명히 체휼했다. 운전하기 전의 기도는 때로 빠뜨릴 수 있지만, 구원을 받았다면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말씀은 너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고 구원을 받았다면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을 분명히 만났다는 의미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라는 말씀과, ‘율법은 범법자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들이 예비역이 군대 이야기하듯이 말할 수 있는 주제여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율법과 죄의 문제는 신학적 영역으로 회피하고 산다. 그것은 일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설교 시간에 우리를 깨우쳐주는 주제로 생각한다.

 

이같이 많은 기독교인은 율법과 죄의 문제를 간과한다. 구원을 받았다면 죄를 깨달았다는 것이고, 죄를 깨달았다면 율법을 경험했다는 말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율법이 되를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을 경험했어야 하고, 그렇다면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말씀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거나 어려운 말씀이나 신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율법을 만나지 못했다는 의미거나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말씀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에게 죄와 율법 그리고 행함과 믿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다. 물론 이런 명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서술할 수 있어야만 분명한 이해가 있고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한정할 수는 없다. 수동기어 자동차로 기울어진 도로에 정차 후 등반하는 것과 같이 굳이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몸에 습득이 되어 있다면 충분하다. 문제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삶이다. 스스로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라고 하면서 정작 삶은 언제나 육체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을 만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갈 3:15-22) 율법의 시간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22. 11:30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의 시간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지 않은 시간은 범법자로서의 시간이다. 이는 대부분 신앙인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태초부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곧 하나님의 약속은 있었다. 반면에 사람이 그 약속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육신이 나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인생의 운명을 대하기까지 혹은 육신의 수고로 인생의 존재 목적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세월이 걸린다. 이 세월을 성경은 천지창조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밝은 빛이 열리기까지 인생의 모든 경영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세계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 태초다. 이 태초를 진정으로 맞이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는 순간 자신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의 육신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하는데, 거듭난다는 것은 이전 것을 버린다는 의미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이 된다는 것은 이전 것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다면, 그렇게 천지가 바뀌는 변화에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이전 것이 무가치하게 되는 사건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전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깨닫고 뉘우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기까지의 모든 시간은 율법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율법의 시간은 죄와 어두움의 세월이며, 사망 가운데 있는 세월이자 공중 권세 잡은 자 아래 있는 세월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세월이기에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정욕을 좇는 세월의 시간이다. 이 모든 시간 속 사람의 가치와 행위와 노력하는 의지와 그 성취에 대한 가치를 일거에 무너트리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인 사람의 노력과 가치는 근원적으로 허상임을 증명하는 증명서와 같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이 죄악임을 강제로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지난 삶이 죄악임을 깨달았을 때, 지난 삶이 약속 안에 있지 않음을 범법으로 하나님께서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한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정의를 내려 본다면 율법은 행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의 삶이 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기준으로서의 법이다.

 

그러므로 결국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영하심의 일환이다. 모든 것은 약속,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기준을 두고서 봐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 것은 바로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이 범법자임을 규정하신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다. 따라서 이 율법은 별도로 주신 것이라기보다 약속을 주실 때 이미 정의된 것이다. 합격자를 정할 때 불합격자도 동시에 정해지는 것과 같다.

 

다만 목적이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든 세월은 약속 밖에 있는 범법자로서 사는 세월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전의 세월이다. 그 시간이 바로 율법의 시간이다. 이것은 시간을 기준으로 명명하였을 때 율법의 시간이지만 역설적으로 천지창조의 시간이고 사람에게 주어진 구원의 때다. 그래서 율법은 몽학선생, 곧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고도 한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아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갈 3:15-22) 율법의 시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21. 09:37 Writer : 김홍덕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절망뿐인 것은 아니다. 율법은 유통기한이 있다. 바로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가 율법의 시간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바울 사도는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는 말씀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자주 했고,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율법은 범법자를 위한 것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속하신 후손이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율법의 시간이 종식되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문제의 답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안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약속하신 자손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 역시 예수님과 동일하게 약속하신 자손임을 보이시고, 그것을 본 사람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약속하신 후손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 자신이 예수님과 동일한 약속하신 후손이 되어야 내 삶의 세계에서 율법의 시간이 끝나는 것이다.

 

내 삶에서 율법의 시간은 나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되었을 때 끝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자손이 될 때 비로소 약속하신 자신이 온 것이다. 내 삶의 세계 안에 오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아도 그 사람은 여전히, 언제나, 항상 율법 아래 있는 범법자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말이 자신의 신앙 고백인 사람은 아직 율법의 시간에 있다는 말이다.

 

이같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한 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때까지는 율법 아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고 해도 그 삶이 율법 아래 있다면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고,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삶의 모든 행동이 믿음으로 난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운전할 때 기도하고 하면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하신다는 것이나 기도하고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더 지혜를 주신다는 것과 같은 말은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담보한다는 생각이므로 당연히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범법자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자신이 율법 아래 있다고 시인하는 것이라도 해야 최소한 율법의 존립 목적이라도 이루어진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수님과 다른 존재이기에 예수님처럼 되려 하고 있다거나, 사람은 성경대로 살 수 없고 다만 노력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 약속하신 자손이 아니라는 증거이므로 자신은 아직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최소한 율법을 주신 목적이라도 이루어진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