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지에 대한 것, 행위냐? 믿음이냐?’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상은 거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앞서서 이것이 시대적 관점에 대한 착각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설명했다. 예수님이 오신 시점은 2,000년 전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동일하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구원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 된 존재라는 의미다. 성경은 거듭나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의로운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생명으로 나는 것은 자기 행위로 인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의 행위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의로워지는 것 역시 자기 행위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생명으로 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태어난 생명은 그 유전자에 의한 고유한 행동이 있다는 점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대로 살고, 생명대로 산다는 것은 그 생명 본성에 따른 행동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는 것만 분명하게 자신의 말씀이 되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같은 법을 따르는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이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면 성경을 대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기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봉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외식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려고 노력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여기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도나 봉사와 같은 것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가르치신 기도 어디에도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관하여 구하라는 말이 없다. 자식의 문제, 건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나라와 세계 평화와 같은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아니라 모두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이라 말씀하신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것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봉사나 헌신 역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일갈하셨다. 육신의 일로서 구제와 봉사는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그것 역시 직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육신의 일인 자식이나 건강이나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나, 육신의 삶의 평안을 척도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에서 잘 살 기회가 있어도 버리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사람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사실은 이런 반문은 기독교 안에 더 많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만 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게 된다고 전하면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도둑질하는 생명이라면 그리스도가 도둑질하는 존재라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역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신 분이 아닌가? 세상을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경영 아래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십자가에 죽이고자 할 때 순종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 죽임을 당하므로 죄인을 구하신 분이 그리스도이고, 그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인데 그가 도둑질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진정한 어두움일 수밖에 없다.

 

이 어두움은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놀랍게도 눈에 보이는 육신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의 뿌리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믿음의 근원이다. 성경을 지켜서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일이고 육신과 세상을 본질로 보니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즉 육신을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는 성경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히 보시므로 주시는 은혜가 육신의 일, 곧 본질적인 일이며 인생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have to)’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본성을 거스를 수 없고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설명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남자로 났다면 그 모든 본성이 남자의 유전자를 따르는 것과 같다. 행여 성전환을 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만 바뀔 뿐 유전자와 염색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성경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살아도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며, 살다가 성경을 펼치면 자신의 삶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차이다그리고 그 차이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로 나타난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육신에게 해로운 일이 생길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독력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다. 육신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에 육신이나 세상의 일이 그릇되면 안 된다는 강박 아래 산다. 그런 사람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상관없이 율법이며, 서기 30,000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율법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는 말씀이 본질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의 일을 본질로 보는 것은 요한 사도가 말씀한 것과 같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한 세상의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반대가 되는 것이기에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므로 율법적인 신앙이 무엇인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 무엇인지는 연구하고 지식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신앙이다. 특히 성경대로 살아야 육신의 일이 잘되고 복을 받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육신이 바라지 않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것이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라면 두말할 것 없이 율법적인 신앙이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