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상관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모든 종교가 다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더 나아가서 보면 사람들의 철학과 모든 종교가 다 이 오해를 풀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가 일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인 계율과 금욕적인 생활 그리고 도덕적인 삶을 살것을 요구하면서 그 결과가 신앙의 대상인 신이 그것에 대하여 보응하고 복을 준다는 것을 그 골격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런 일관된 사고 방식에 보편적으로 순응해 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사는 이유와 불안한 내세에 대한 보험으로 이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형식에 관한 예의와 행동을 선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사람들의 가치관은 한 마디로 궁창 아래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 양식, 그러니까 "얼마나 도덕적인가?", "종교적 규례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 하는 것들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도덕적으로 살고 내세에 천국이나 극락에 가기 위함이다?"> 이게 정말 사람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그렇게 행위 규범을 다스려야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사람들의 행위 양식과 그것을 표준화 한 법이나 규례는 시대와 장소, 국가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면 다 동일한 조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재 이유나 정체성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 국가와 시대의 요구사항일 수는 있지만, 인간 본질의 정체성은 아닌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형식이란 옷과 같다. 예식장에 갈 때는 밝은 정장을, 장례식장에 갈 때는 검은 정장을 입는 것은 상황과 여건에 따라 형식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형식에 관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형식이라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예수님은 매 시대, 모든 상황, 모든 문화와 모든 나라에 다 각각 오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맥락에서 보고, 그 답을 찾아 헤매고 열심히 하는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고, 이것은 궁창 위의 물 즉 상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궁창 아래의 하수와 같은 형식으로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물을 마시는 사람은 끊임 없이 목이 마른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런 형식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상수를 마시면 하수가 나오듯이, 본질을 알면 형식은 그냥 나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빛이 있어 하나님을 인식하고 난 다음에 내용과 형식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과정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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