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사람으로서 무엇을 취해야 자신의 정체성의 갈증과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이유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둘째 날의 과정에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고 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누셨으므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람이 자신이 마실 물과 버릴 물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말이다.


하나님의 기준과 법에 따라 마셔서 되는 물, 즉 마시면 인간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고 버려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에 대해 다양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돈을 많이 벌면 인생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다 형식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아니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내용과 형식>이 있다. 정확히는 <존재의 목적>과 <존재의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돈이나 도덕이나 지위나 나이나 권력이나 남자 혹은 여자라는 것이나 이런 모든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절대로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에 열심인 것이 인생의 목적인 줄 알고 계속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마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과 자신과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이런 것은 갈증을 해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고, 결국 이 세상에 두고 가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신 것은 사람이 무엇을 마셔서 인간의 정체성,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이유에 대한 의문과 혼돈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마실 것과 마시지 않고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열린 사람에게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둘째 날의 창조인 것이다.


사람들은 늘 형식과 목적에 대하여 혼돈한다. 돈을 모으면 인생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알면 돈은 어떤 규모로 소유해도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혼돈은 아는 것 같지만 알 수 없고, 늘 혼돈 가운데 있어서 서로 말도 많고 주장하는 것도 많지만 그럴수록 혼돈만 가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점점 구분되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사람의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그리스도지, 예수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과정은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해가는 안목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과정을 경영하시는 경륜 안에 절대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형식에 관한 분이 아니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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