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사람은 자기의 삶을 둘러싸고 또 구성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감사>라는 것이 교회에 다니니 하나님께 그저 감사해야 하는 단계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순간 순간을 감사하게 된다.


그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 이전에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방에 있는 선풍기, 책상, 침대 등에 부딪히듯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인하여 늘 고통을 받고 살다 보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고달파서가 아니라, 오직 어두워서 그런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어두운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웠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이라는 인식의 세계가 자신 앞에 열리면 이전에 나를 괴롭히던 세상과 삶의 요소들이 하나둘씩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되고, 그 이유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에 도움이 되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삶의 한 절, 한 절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의 세계가 시작되면 그 세계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고 더 그것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빛으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하여 물을 찾아 헤메었지만 늘 마셔도 목 말랐던 이유를 알게 된다. 빛이 있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사람은 자신이 먹어야 할 물과 먹어서는 안되는 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사회가 고도화 되면서 마시는 물을 '상수'로 마시지 못하고 버리는 물을 '하수'로 점점 세분화 하게 되듯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빛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인생의 정체에 대한 해갈을 무엇으로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성경은 이것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물이 나뉘게 하셨다고 표현하셨다. 그것이 둘째 날이다. 필자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알기 시작한 이후에는 무엇이 내가 마셔야 할 물, 곧 무엇이 내 것으로 삼을 말씀인지, 무엇이 나를 갈증나게 하는 것인지를 하나씩 알게 되었다. 물이 점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나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 했기에,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지 마라는 것을 마셨다. 기도해라, 성경 봐라 하는 말씀을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빛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식 아래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나누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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