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세 가지이다.

  • 돌로 떡이 되게 하라

  • 높은 곳에 뛰어 내리라

  •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


예수님의 시험에 대하여 알려면 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든 세례를 받으시든 그 어떤 삶의 모습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과 삶을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우리 사람에게 다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도 다 동일한 시험을 받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사람들은 마귀를 보기도 힘들고 본 사람도 별로 없는데 우리를 시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무엇인지를 알면 오히려 마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귀를 봤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그 마귀가 어떤 것인지를 알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마귀의 시험과 유혹이 있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귀는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고 했다. 이것은 40일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주리셨으므로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마귀에게 굴복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처럼 보인다.(실재로 그런 설교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시험은 단순히 마귀가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주느냐? 아니냐? 하는 시험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에 대한 시험이다. 마귀가 시험하는 시험의 전제가 무엇인가 하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 마귀의 시험은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 그리고 모든 인생들이 받는 시험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로 떡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쯤은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40일 금식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금식기도라는 것이 음식을 금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아주 큰일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다. 보통 사람은 한 끼만 굶어도 힘든데 물도 마시지 않고 40일씩 참고 기도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정말로 중요한 것을 기도할 때 금식기도를 했다는 기록들이 제법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른반 사생결단이 필요한 것을 기도할 때 금식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기도한 사람의 신앙을 대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금식 기도든 어떤 기도건 간에 기도의 본연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한다면 그것이 40일 금식이 아니라 1년을 금식해도 다 헛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질그릇과 같이 지어진 존재이다. 즉 어떤 것을 담아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담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도와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식을 갖춘 기도라도 이 기도의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다. 통화는 안 되는, 그러나 금으로 만든 귀한 휴대폰이 아무런 의미나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신을 비워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간절함이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표현된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금식기도이고 또한 기도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육신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지고 사생결단하듯이 기도한다면 그건 마치 대형 마트에서 장난감 사주지 않는다고 동네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그럴지 모른다.


지금 예수님의 금식기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채우시기 위한 금식이다.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 그러니까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채우기 위하여 그릇을 비우심과 같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공생애의 삶과 같은 것을 채워나가는 빈 그릇이기에 삶으로 채워나갈 빈 그릇과 같이 자신을 비워내어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채워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40일 금식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의를 자신 안에 채우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설사 방언을 받으려 하였다 해도 기도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중에 하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마태복음 말씀의 흐름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것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시험하는 것으로만 봐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오니 마귀가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시험하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에 대한 마귀와 예수님의 견해차를 드러낸 첫 번째 시험을 한번 보면, 마귀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돌을 사람일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드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마귀의 관점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초인간적인 존재와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함께 있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능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잘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생각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더 나아가서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이 바로 마귀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초인간적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왜 돌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돌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돌이라고 하면 <율법>을 의미한다. 모세의 십계명이 돌 판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이다. 즉 율법으로 죽이라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율법적인 관점에서 용서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소소한 기적을 일으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본질적인 의미는 율법이라는 것이 사람의 양식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첫 번째 시험의 본질인 것이다.


이 시험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시험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유혹이라는 것이다. 돌에 새긴 율법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발견되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사람의 본질적인 음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고, 또한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시험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라고 하면 십계명이나 레위기에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말씀이나 규례나 법도와 같은 것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으로 예수님을 부른 것)가 되리라 생각하는 생각으로 보는 모든 성경말씀은 다 율법이다. 즉 신약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켜 행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된다고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신약 구약할 것 없이 다 율법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이 된 존재가 아니면서 행동만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고 시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이다. 즉 군복만 입으면 군인이 아니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기에 군복을 입는 것이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군인이 아닌데 군복을 입는 것, 그것이 바로 거짓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에 답하시기를

사림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느니라(마 4:4)

이라 하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이김이 되겠는가?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과 같은 대답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예수님의 답변이 왜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것인가?


어쩌면 예수님께서 "돌은 사람이 먹을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떡으로만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뭔가 질문과 대답의 연관성이 좀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마귀의 시험의 핵심이 율법에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 먹는 육신의 양식이 아니냐? 묻는 것이고, 그것은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니 이 율법을 사람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돌을 떡으로 만듦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 마귀의 시험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육신이 지켜야할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낼 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서 율법에 규정된 것을 의지를 가진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으로 비롯되는 존재를 말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인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늘 마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관점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생각, 유혹을 늘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행동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으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속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것이 마치 땅에 심긴 씨가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듯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살아가는 모양을 보니 율법의 모든 것이 다 지켜지는 삶이 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첫 번째 시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인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 유일한 표준이고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같은 시험을 늘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배고프더라도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나, 단순한 담론처럼 먹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만 추출하고 넘어가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에 있어 육식이 무엇을 먹느냐? 더 나아가서 이 육신이 돌에 새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마귀의 유혹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말씀이 생명으로 열매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관련글>

[평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