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과정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으로, 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으로, 또 예수님의 출생과 공생에의 과정으로 설명이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들은 그것을 읽고 듣는 사람에게 주관적인 의미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고 성경의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의미 있고, 자신의 이야기로 듣는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그것에 대한 문학적 분석과 고찰을 하는 사람과 효자가 된 사람 중에 누가 더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애굽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애굽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만이 자신이 그 안에 속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에 속한 자신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은 항상 애굽이라는 세상의 가치관에서 출발한다. 애굽은 피라미드가 있는 나라다. 즉 위로 갈수록 성공한 나라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고 내려오는 나라다. 이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경쟁이다. 이런 경쟁은 항상 상대는 패자요 악한 자로 만들고 나는 승자와 선한 자가 되어야 하는 구조이다. 이때 승자와 패자,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그 나라의 의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세상의 기준이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인간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선함과 악함을 나누는 기준인 곳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진 인생이 되려면 자신이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출발을 벗어난 것은 없다. 천지창조 이전의 흑암이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이 400여년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종살이 같은 것이다. 오리 무리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백조, 즉 미운 오리 새끼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면 다음은 성경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여정을 거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신앙 고백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될 때 그 여정의 연장선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신앙은 결국은 떠나야 할 자리지만 중요한 자리이다. 애굽의 여정이 '여기서 살 수 없구나!'를 깨닫는 것이라면, 광야와 같은 율법의 여정,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 내려하는 여정은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구나!'를 알게 하는 여정이다. 이 두 전환점 사이에는 홍해와 요단강이 있다. 즉 두 번의 세례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물세례와 불세례라 할 수 있다.


애굽의 여정에서 사람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이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기준과 피라미드였다면, 광야와 율법의 여정, 행함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여정의 기준은 형식이다. 즉 어떤 기준에 맞는 행함의 유무가 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야 진행할 수 있었듯, 술을 마시지 않아야 선이 되는 것이다. 즉 어떤 행함의 증거가 있어야 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었다. 즉 행함을 신앙의 선으로 보는 신앙은 광야에 속한 신앙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많은 교회들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선하고 장로가 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건 거의 불문율과 같은 것이 되었다. 어떤 교회가 운영하는 카페의 이름이 '도시의 광야'인데 그 이름을 명명한 것이 그들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광야는 분명한 규범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구름 기둥이 있어야 낮을 견딜 수 있고, 먹는 것도 반드시 만나와 메추라기 그것뿐이다. 어떤 경우도 광야가 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례 요한의 의복과 음식이 다 광야에서 나는 것이듯이 말이다. 광야는 또한 일렬로 걸어야 한다. 지금의 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자세히 물으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정해진 길로만 오라고 한다.


신앙의 표현도 획일적이고 어떤 기준 그것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가나안에 가면 구름기둥도 불기둥도 만나와 메추라기도 없어지고 다니는 것도 일렬로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 자기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을 때 나라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작은 소자가 세례 요한 보다 낫다고 하신 것이다. 즉 광야와 같은 신앙, 행함으로 선을 규정하는 신앙의 극단도 가나안과 같은 신앙의 갓난아기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다 믿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렇게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다. 즉 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을 물세례와 그리고 성령이 하늘로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세례(불세례)가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은 당연히 우리의 여정도 그러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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