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23 나사렛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1. 17:10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의 나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나심을 중심으로 말씀들이 있지만, 2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헤롯왕이 죽고 애굽에서 돌아 올 때에 요셉이 아기 예수를 걱정하여 나사렛으로 이주하게 되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있다고 하는데, 갈릴리나 나사렛의 지명의 의미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갈릴리나 나사렛이나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라는 나다나엘의 말에서 보듯이 좋은 동네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사렛 예수라는 예수님의 호칭은 정말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말이다. 특히나 지금 이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고 숭배(경배가 아니라)하는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천한 동네의 예수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한번 이야기 해 본다면,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이 간혹 하는 질문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하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은 똥 눴나요?"하는 그 질문 말이다. 이건 일면 우습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반사적으로 '그걸 말이라고?' 라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뭔가 예수님이 신비로운 느낌을 가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질문을 하면 반사적인 대답이 아니라, '사람이니 당연히 그랬겠지?' 근거를 도입하고서야 그렇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화장실도 안 가실 정도로 거룩(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의 의미는 아니지만)하고 경건한 분으로 여기는 의도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경건함과 신성은 다른 사람과 육신의 차이나 육신을 가졌지만 생활 방식이나 성격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보다 높고 다른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한 마디로 빈민촌이다. 가난하고 또 돌아서면 당시의 사람들이 터부시하는 부류의 사람들인 죄인과 창녀와 병자와 세리와 같은 사람들이 득실대는 그런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한국의 강남과 같은 곳과는 전혀 반대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비범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고 보통의 사람과 다를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그래서 이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 이사야의 때부터 예언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상태고, 동일한 신분과 육신으로 오신 것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이 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유대 왕실이나 로마의 황실에 태어나심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삶을 사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따를 수 있을까? 물론 왕족이나 몇몇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겠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자리를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중에서도 아주 기준이 낮은 사람의 신분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회 정의라고 하는 것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성경을 몰라도 아주 모르는 소리다. 그냥 문자만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심청전을 인신매매가 성행하는 막장드라마로 보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구속이 차비 대신 내어주듯, 죄 없는 사람이 죄 지은 사람 대신해서 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구속은 십자가의 대속이다. 그것은 높이 달리는 구속인 것이다. 옛날 십자가나 여타 사형 집행에 있어 그 집행 장면이나 주검을 사람들이 보게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구속과 삶은 그 모습을 보고서 '나도 그렇게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법인 것이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나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님의 구속의 법이 바로 이런 구조를 따른다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이신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해결하려 하셨던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잉태되듯 거듭나는 것임을 보여주심으로 누구나 성령의 감동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한 동네인 나사렛에서 오신 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누구라도 '(그들도 되는데)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사렛예수 그 자체이다. 나사렛에는 천하고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 손가락질 하는 그런 사람들 있는 곳이고,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그런 동네이기에,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죄인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더 나은 곳, 더 고상하고 더 안정적인 곳으로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열심히 그렇게들 살아간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는 삶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시듯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죄인 같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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