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예수님 보다 앞서 복음을 전파한 선지자다. 다른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선지자인 셈이다. 모든 선지자의 예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선지자의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예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직접 예수님을 보고 바통을 터치하듯 예언의 현현으로 이어진 선지자라 할 수 있다.


모든 선지자의 예언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자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언은 예수님께서 흙으로 지어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으로 모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결국 흙으로 지어진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 자신의 삶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보이시고 전하러 오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말씀이기에 그것이 모든 인생의 존재와 삶의 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여간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회개의 복음을 전한 선지자다.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친척관계이고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 그런 세례 요한은 우리 신앙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기록할 만큼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내용이 빈약한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모든 말씀은 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말씀으로 나에게 주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기본적으로 광야에 살았다. 그의 의복이나 음식이 다 하나 같이 광야에서 나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자기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와 자신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다. 뭐랄까 신토불이처럼. 그가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말씀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아가는지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또 예수님의 생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개인의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으로 본다면, 피라미드와 같은 세상, 그러니까 세상의 경쟁의 법에서 승리하고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이겨가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태신앙이라고 한다 해도 그런 가치관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몸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간다고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늘 말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형식과 같은 몸이 어떤 모양이나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애굽의 가치관을 자신의 의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거짓말 하는 사람이고,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온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애굽에 가셨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의 출발은 애굽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애굽의 가치관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으로는 광야를 거치게 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다. 그들이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거닐게 되듯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자신의 삶이 나아가는 것 역시 광야 같은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광야에 바로 세례 요한이 있고, 그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이 다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나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관이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야는 어떤 곳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는 한 줄로 서서 모세와 언약궤를 앞세워 걸었다. 구름기둥이 일어나면 걷고 그렇지 않으면 머물렀으며, 불기둥이 일어나면 걸었고 그렇지 않으면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다. 어떤 분명한 기준이 있어서 그것에 맞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신앙생활의 여정이 광야의 여정이다. 뭔가를 하면 괜찮고 하지 않으면 불안한 신앙, 그리고 그런 신앙의 가치관 그것이 바로 광야의 여정이고 율법의 여정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술을 마셔도 되나?', '노래방은?'과 같은 질문을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되느냐 아니냐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줄로 걷고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듯 어떤 제약이 따른다. 술 마시는 것이 죄라고 치자, 그러면 소믈리에(sommelier : 포도주 전문가)와 같은 직업군 안에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다.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죄인데 그런 직업을 가져서 되겠는가? 포도주는 괜찮다고? 그건 타협이다. 이렇게 되면 땅 끝까지 복음 전하기는 그른 일이 되는 것이다.


율법적인 가치관의 시절은 누구나 거친다. 아마도 종교 여하를 불문하고 그런 과정은 다 거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공부도 그렇다. 이차방정식을 공식으로 푸는 사람과 이차방정식 공식 자체를 유도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이렇듯 율법적이고 형식을 지킴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모든 세계 안에 다 있다. 특히나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정이 필수적이기도 한데, 문제는 그것이 전부라고 알고 머무르고 그 안에서 신념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바로 그런 문제가 현실화 되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바로 이슬람과 한 때 기독교를 국교처럼 여겼던 서구세계와의 마찰이 그렇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보면 형식적인 신앙, 신념으로 믿는 신앙의 극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응점에 있는 서구사회 역시 같은 레벨에서 적이기에 같은 링에 올라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적인 신앙은 오늘날 교회 신앙의 근간이 되어 있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의 행사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방향과 개념과 생명과 법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교회를 크게 지어 놓으면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형식과 신념으로 뭉친 광야의 신앙인지를 자백과 같은 것이다.


광야는 가나안과 완연히 다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다. 소리와 복음은 전혀 다른 것이다. 소리는 어떤 룰을 알리는 휘슬 소리 같은 것이다. 그야말로 광야의 소리이다. 어떤 것을 지키면 안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 그 세계에는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소리다. 그냥 신호음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설교라고 다를 바 없다. 그 안에 어떤 현란한 문구가 있어도 그 주제가 '하라', '하지마라'와 같은 행위(Do)와 드림으로 세상의 경제적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소유(Have)의 신앙을 말하는 것은 다 휘슬 소리와 같은 것일 뿐이다.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면 나중에 천국 가서 복 받는다는 것과 심판의 휘슬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는 신호음과 뭐가 다르겠는가?


세례 요한의 외침도 그래서 소리다. 광야에서 나는 외침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세계의 모든 외침은 다 소리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소리라 해도 복음이 아니라 소리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거치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것에서 머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과 같이 세례를 받고 가나안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땅, 땅에 있는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의가 지시된 자리로 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까지 가야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이고, 이 여정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디인지를 알게 하는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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