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시험을 이기시고 난 다음,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전의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또 다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전제하에 시험을 하는데, 이번에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보통의 사람들은 다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초인간적인 존재이므로 다치지 않을 것이니 뛰어내리라고 시험을 하는데 그것이 두 번째 시험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이라면 두 번째 시험은 신비주의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시험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유혹이고 시험이라면,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육신과 다른 육신의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사람들이 쉽게 사람이 장비 없이 육신만으로 하늘을 난다거나 바다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에게 초인간적인 능력을 기대하고, 또 그런 결과가 일어나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 있겠는가 싶겠지만 사실은 정말로 많다. 물론 듣고 보면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웬만하면 그런 기대를 해 보기도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러니까 시험에 잘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으로 수고하지 않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상한 생각을 하나 하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항상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시험을 치고서 하나님께서 잘 보살펴 주셔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그런 사람들의 조롱, 그 조롱의 마음들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어떤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굳이 기적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다 가진 어떤 본능을 제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교회의 초등학생들이 '예수님은 똥 누었나요?'라는 질문을 한다. 아이들이 그런 궁금증을 가지는 것이 우습긴 해도 대답하는 교사들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아이들이 그런 궁금증을 가지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즉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르쳤는데, 육신을 가진 아이들 자신과 예수님이 다르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답하는 교사도 아니라고 대답하기 전에 '사람이니 당연히 화장실도 가셨겠지?'하는 논리가 선행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그런 사고방식의 더 큰 문제는 다른데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 다 화를 내는 일에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사역과 받으신 시험과 십자가의 모습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본다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면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와 품성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아니면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차이점도 없이 자기 본성대로 살면서 아무렇게나 화내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덕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본성은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되게 사용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사실 그런 질문과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두 번째 시험에 빠진 것과 진배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육신이 가진 한계와 본성에 대하여 이미 스스로 문제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가진 문제와 한계를 문제시 삼는다는 왜 두 번째 시험에 빠진 것이냐 하면, 기적을 바라는 마음의 뿌리가 바로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에서도 숨 쉴 수 있다면, 또 맨 몸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면 투신자살도 없고, 또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으니 공해도 없고, 그러면 경제적인 문제도 없을 테니 얼마나 좋겠는가 싶을지 모른다. 지금 마귀가 예수님께 하고 있는 시험이 바로 그런 생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육신의 한계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육신의 한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육신이 가진 갖은 본능들, 식용이나 성욕이나 명예욕과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하여 무신경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에 대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물리치신다.


왜 두 번째 시험에서는 예수님께서 뭔가 좀 대응이 될 만한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면 '닥쳐라!' 비슷한 대답을 하셨을까? 생각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마귀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험이 하나님과 내기를 하는 것과 같은 시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뛰어내릴 테니 살려주나 볼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행여 자신이 가진 육신이 불편하고 고쳤으면 좋겠고, 또 좀 고상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 육신으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즉 우리가 불평하는 이 육신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최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의 안목의 차이가 있는데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에 대하여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이 육신이 가진 것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되고, 행여 기도로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을 보면 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설마 싶겠지만 하나님을 좀 믿는다하면 누구나 다 해 봤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또 예수님께서 직접 시험을 이기심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험에 빠질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가진 육신에 대한 잘못된 견해,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이 연약한 육신으로는 안 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고 기도하면 병자가 막 낫는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영지주의의 뿌리이다. 영지주의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진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육신은 아무렇게나 해도 신앙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신앙의 모든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 있다. 영지주의든 율법주의든 모두 다 육신의 상태를 만족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육신을 가만히 보니 그 모양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같은 것이다. 율법주의자는 그래서 취한 방법이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영지주의는 육신은 그냥 소모품이니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차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유혹과 시험이고 두 번째 시험은 영지주의적인 신앙적 유혹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사람이 이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신앙의 절대적인 문제이다. 인류의 원죄인 선악과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벌거벗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보니 이 육신의 정체가 다 드러나는 것은 부끄럽고 감추고 대책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은 결국 이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육신이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면 돌에 새긴 율법이 자기 음식이 되듯 율법을 지켜 내거나 아니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귀와 그렇지 않고 이 육신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시는 법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과 같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는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가치관과 법에 의해서 그리고 또 죄도 없어 보이는데 잡혀 와서는 자신의 유대인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로마의 법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데자뷰처럼 마귀의 시험과 똑같은 조롱을 받으신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도 않고, 같이 달린 강도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그 조롱을 이겨내심으로 자신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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