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신 다음에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 나셨다가 가버나움에서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고, 예수님께서 믿음을 칭찬한 두 사람 중 하나인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마을이고, 또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메고 와서 고치신 마을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시는데 그 시작이 되는 시점이 이상하게도 세례 요한이 잡혀 간 이후부터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다. 세례 요한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율법 세계의 최고봉이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 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다는 것이 율법 세계, 광야의 세계, 뭔가를 하면 괜찮고 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마음을 느끼는 신앙 세계의 최고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례 요한이 잡혀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은 어떤 상관이 있기에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우리에게 전하셨을까? 이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과 예수님의 역학관계나 예수님의 특수성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이 세례 요한이 물러가고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겪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세례 요한의 과정이란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걸을 때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을 때만 진행하는 것과 같이 성경 말씀을 휘슬 소리처럼 신앙생활의 어떤 신호와 기준으로 알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삶을 사는 시절과 과정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겪는 각각의 일은 다르지만 개론은 동일하다. 누구나 애굽과 같은 세상의 법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든 시절이 있다. 그 안에서 이기려는 것은 각각 다르지만 그런 시절은 누구나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영광을 좇는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가는 것이 선이고 이기고 성공이라고 믿는 시절이 다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 까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듯 애굽의 가치관을 벗어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애굽에 속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것에 만족하는데 그곳에서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광야와 같은 세월을 보낸다. 뭔가를 하면 마음이 편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을 거친다. 공부로 보면 공부를 하지 않고 있던 시절을 애굽의 시절이라 한다면, 공식을 외우고 의미는 모르면서 외우는 시절을 광야와 같은 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에 있어 그런 시절은 어떤 시절인가 하면,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하는 의문에 쌓여 살아가면서 겪는 일과 결정 앞에서 어떤 해답을 찾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몰입한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절의 최고봉이고 그 세계에서 가장 큰 자가 세례 요한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청년(그가 고등학생일 때 내가 고등부 교사였던)이 내게 와서 자유로운 신앙의 모습을 보인 나에게 이것저것 따져 물은 일이 있었다. 하나씩 대답을 하다 보니 이 청년의 의도가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따지고 드는 것이 목적이기에 이렇게 물었다.

"너는 모세 보다 크냐?" 그러자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가서 생각해 보고 네가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다시 오너라."라고 말을 했더니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가 버렸다. 그리고 15년이 넘었지만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이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믿는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앙이 아무리 어려도 세례 요한 보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세례 요한은 고사하고 모세보다 크다고 느낄 수 없는 것은 모세의 업적과 자신의 업적을 비교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업적이라는 것이 아무리 위대해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과정에 쓰인 업적이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모세와 같은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면 그 세계 안에서 아무리 수고하고 목숨을 버려 교회에 충성을 해도 광야의 세계에서 충성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가나안을 누리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충성과 신념에 충만하면 제사장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나에게 따지러 온 그 청년과 같이.


광야의 세계, 세례 요한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그런 세계는 항상 마찰이 있다. 어떤 것을 행동으로 지켜 내려면 규범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율법이다. 율법의 특징은 이분법적 논리라는 것이다. 율법을 기준으로 지키든지 아니면 범하든지. 그와 같은 이분법적 가치관은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이분법적 논리에 접하게 되면 어느 누군가는 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두 이기는 경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교회가 사회와 늘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많은 교회의 신앙이 광야와 같은 율법적인 신앙 세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무엇을 해야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행위 규범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 증거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헌금하면 천국에 상급을 쌓아 주신다.'와 같은 것이 다 행위 규범이다.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 같은 것들이다. 이는 신약을 전한다 해도 율법적인 신앙일 뿐이다.


기도는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 자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기도를 흔히 영적 호흡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호흡을 노력이나 신념이나 의지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냥 살아 있으니 하는 것이 아닌가? 찬양도 그렇다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찬송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찬양도 기도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신앙이다. 기도나 찬양이나 또 다른 신앙의 모습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기 때문이다. 개가 짖듯이.


그런 가치관, 그러니까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분법적이고 율법적인 광야의 가치관, 그것이 사로 잡혀가지 않으면 천국의 복음이 전파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잡히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했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신앙의 여정을 가는 한 사람의 마음 안이고,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 사람 마음 안에서 광야와 같은 가치관이 있다가 세례를 받음과 같이 그것에서 만족이 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나라를 이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삶을 꿈꾸고 그곳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즉 광야와 같은 가치관, 이분법적 가치관, 무엇을 해야 온전해진다고 생각하는 종과 율법의 가치관이 세례 요한이 잡혀가듯 없어져야 비로소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삶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하나씩 채워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혀가고 또 죽고 난 다음에야 복음 전파를 시작하신 것은 세례 요한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안목과 가치관과 믿음이 세례 요한과 같은 율법적인 가치관이 사로잡혀가고 나야 비로소 그 마음 안에 복음이 온전히 자리하기 시작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지 세례 요한 때문에 예수님이 하실 일을 못하시는 분은 아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잡혀 갔다. 즉 세상의 권세에 잡혀갔다는 것이다. 이것도 큰 의미가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율법적인 신앙 가치관은 세상의 권세에 잡혀가기 마련이다. 즉 율법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하면 회사 생활에 부담이 되고 직장 동료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져야 한다. 그래야 율법의 목적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이 죄인으로 발견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율법을 지키려 해도 결국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발견되도록 하신 것이 율법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하여 음욕을 품는 것 그것으로 이미 간음이라 했다. 


즉 율법을 더 엄하게 적용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그것을 행함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광야와 가나안 사이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즉 광야와 같은, 율법적인 가치관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좇아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을 거쳐야 한다. 즉 세상의 법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살다가 그것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규례를 행함으로 지키는 삶을 살다 보니 인생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잡혀간 것이다. 헤롯에게 잡혀간 것이다. 즉 율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율법을 몸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에 지고 율법적인 가치관은 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세례 요한이 잡히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록하신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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