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을 농담처럼 나누기도 한다.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사람이 먹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늘 그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안에 채우기를 가장 원하는 것은 당연히 그 정체성이다. 이것은 갈증이다. 모르면 목 마르다. 그래서 이것은 육신으로 본다면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늘 물로써 표현된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리라>하신 것은 여자가 물을 계속 뿜어 낸다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것을 늘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해갈을 위해 평생의 시간과 육신의 힘을 소비한다. 그러나 어떤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수가성 여인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갈증이 세상적인 비난 속에서도 찾아 헤매는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육신으로도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해져서 죽는다고 한다. 이는 참 묘한 것이다. 지구의 70%가 바다인데 그것은 먹지 못하고 실재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지구상 물의 겨우 1% 정도라는 것이 참 놀랍다. 이는 세상의 모든 철학과 행위와 율법 중심의 모든 종교와 과학과 돈과 명예와 쾌락 등 바다와 같이 널리고 널린 것으로는 갈증이 해갈되지 않고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해져서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사람이 왜 창조되었고,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한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물을 마셔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둘째 날과 셋째 날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궁창 위의 물, 즉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마셔야 한다는 것과, 궁창 아래의 물이 모여 있는 바다에서 땅이 드러나듯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행위와 율법 중심의 모든 종교와 과학과 돈과 명예와 쾌락 안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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