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다는 건 죽을 지경에서 건져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원받기 전 기독교인들의 삶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면 구할 수 없을 정도의 위험에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면 그 위험은 무엇인가?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은 이걸 분명히 알고 있을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사실 이걸 잘 생각해보지도 않아 보인다.

 

우선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이건 다분히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 말을 진심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기도할 때는 회개로 시작해야 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처럼 분명한 모순에도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여러모로 죽음에서 건져진 사람의 태도로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구원받았다는 삶은 구원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구원 이전이나 받은 다음이나 추구하는 건 똑같이 세상 가치다. 성공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안다고 목적이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힘이나 다른 신으로는 안 되니 하나님으로 의지하는 대상으로 세탁했을 뿐 생물로 보면 같은 걸 양식으로 삼는 같은 생명이다.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구원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세상의 가치를 양식과 소망과 성공으로 삼는 이상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구원은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구원인가?

 

출애굽기는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우리의 구원이 무엇으로부터, 어디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을 통해 말씀한다.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국고성을 쌓는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세상 가치를 추구하고 굳건히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을 통해 얻으려는 삶과 신앙이 구원받아야 하는 종살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러 가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가치를 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자기를 희생으로 드리는 사람이란 의미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건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경을 지켜서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얻으려는 것과는 반대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한 목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일을 위해서 사람을 부유하게 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주권이지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건 아니다. 출애굽기를 주목해서 봤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구한 건 노예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지 이스라엘 백성이 구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세상 가치를 좇는 삶에서 행여 뒤처져 육신이 더 수고해야 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히려 그런 가치관에 사로잡힌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 감춰진 세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종살이, 행여 하나님을 진노케하지는 않을까 근심하는 마음으로 전전긍긍하며 성경을 지키는 노력에 숨겨진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게 구원이다. 하나님은 그런 걸 의와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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