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24. 10:18 Writer : 김홍덕

죄와 의에 대한 모순된 일반적 견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죄인인가를 생각해보자.’라고 한다면 어떨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야!’라고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실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자신 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그렇게 인간이 완전하지 않고,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불연 듯 실수처럼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라면 이 죄를 어떻게 벗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얼버무리듯이 정말로 천국에 가려면 모든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기 전 그 찰나에 죽어야 하겠지만, 이건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몇 명이나 누렸을까 싶은 것이고, 그것 역시 사람으로서 너무 얻기 힘든 행운 같은 일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벗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대안처럼 보이는 변명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부연 설명들을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종파의 교리에 따라 첨가한다. 예를 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라든가, 아니면 ‘그런 자신의 문제와 한계와 죄를 해결하는 대상을 하나님으로 정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식으로.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모순된 논리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완전한 행동과 삶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것에 미치지 못해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서 그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종교적인 율법과 경전의 말씀들을 지켜서 죄를 벗고자 하는 것이 그렇다. 자기 행동과 삶이 의에 이르지 못해서 죄인인데, 그 행동과 삶을 올바르게 해서 죄인의 신분을 벗으려 한다는 것이 모순인 것이다. 그 와중에 단지 행동의 가이드가 성경이기 때문에 대부분 지켜내지 못하는 자기 삶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자기 행위가 의롭지 못해서 죄인임을 인정하는데 그 행위를 스스로의 노력과 신념으로 의롭게 하려고 노력해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딱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내 말을 믿어봐’라는 말 만큼 불신을 자인하는 말이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위가 의롭지 않아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의인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인이 될 때와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다 아시고 무엇보다 우리의 그런 모든 모순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차비를 대신 내어준 것처럼 내 죄를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하지 못하는 행위의 의로움을 예수님께서 대신하셨는데, 그런 의로움을 가지셨으면서도 죄인이 되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내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의 논리지 성경의 논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조차 행위로 구원하지 못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손과 발이 못 박혀서 꼼짝도 못하셨는데 무슨 행위로 의롭게 되시겠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대속은 그런 대속이 아니다.




죄에 대한 근본적인 안목의 괴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근원된 기준은 <자기 행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몸의 행동과 마음의 행동(생각)을 아우르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경우가 늘 있기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그런 기본 관점을 살펴보면, 사람이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악하기에 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위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가지신 죄에 대한 기준이 사람의 행동과 말과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렇게 하라’ 또는 ‘이렇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자신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느냐 아니냐를 심판의 기준으로 보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Do와 Have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행위와 소유를 판단하시는 분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라고 부르면 이 무슨 모순인가?


그리고 이 모순의 절대적인 맹점은 사람은 그런 기준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간주하고서 스스로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 규정된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죄인이 되었던 그 불완전한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더욱이 매일 실패하면서 ‘더 잘하자!’라고 뇌까리며 신념을 북돋우는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신앙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 <“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하는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을 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부터 재정립을 해야 한다. 아니 늘 입으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과 자기가 행동으로 죄인이 되었으니 행동으로는 성경이나 어떤 경전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이 괴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평생 성경을 수천 번 읽었어도, 또 행동으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줬다 해도 말짱 도루묵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인정되지 않는다면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느라 남들 누리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괜히 인생만 허비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난리 법석을 떨면 뭐하겠는가? 산에서 낚시 하는 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기 말과 생각과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맘대로 된다면 그것을 잘 제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자기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이신 반응이 우리와 달랐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게 모순 덩어리로 보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지으시고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셨다.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여기는 이 육신의 삶을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문제를 보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행위가 선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늘 이것을 극복하려고 좋은 생각을 하려하고, 또 행동을 바르게 하려고 힘을 쓴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그 노력이 수포가 되면 회개한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아담과 하와와 지금 우리가 다른 존재인가? 그때는 날개가 있어서 막 날아다니고 했는가? 그것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다 같다. 바뀐 것은 단 하나, <사람이 사람을 보는 관점> 그 하나만 달라진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먹고 배설하고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단 하나의 사건이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 자신을 보니 벗은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벌거벗고 여자인 하와와 에덴동산에서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벗은 것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단 하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악한 과일도 아니고 선과 악이 함께 이름에 있는 선악과를 먹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맞이한 하와에게도 또 하와역시 아담에게 자신이 벗은 것도 감추어야 했고, 상대가 벗었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목이 바뀐 것이다.


이것을 성경이 죄라고 하셨다. 이 죄의 정체는 바로 <사람을 볼 때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하는 자기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죄인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보니 자기 자신도 부끄럽고, 벗은 다른 사람도 못 볼꼴이라는 것이다. 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 그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정체성을 보니 그 꼴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과 생각이 죄라고 사람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사람이 죄인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바로 여기에 사람의 죄가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보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사람이 가진 자기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인 이유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과 행동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그 생각을 하나님께서 <악(惡)>이라고 하신 것이다.(마 9:4)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가 사하여 졌노라”>하심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사람이 죄를 사한다고 하니 참담하다.’하는 생각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 바로 <악한 생각>이라고 꾸짖으신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평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인 자기 자신과 또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그 안목을 가졌기에 죄인인 것이다. 그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먹었으니 자기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자기가 심판하고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볼 때 아담이 부끄러워한 것처럼 여기면 연단하게 되고 채근하게 된다. 또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보면 비판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아무리 지켜도 되지 않았던 것은 그 속에 사람에 대한 기준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아야 한다. 그 기준이 자신도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도 온전히. 그러려면 비판하는 이유가 없어져야 되는 것이다. 그게 마음에 남아 있는데 노력으로 될 것 같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평생 죄인이다. 그렇게는 죄가 사해질 수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불연 듯 또 비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자기 안에 남아 있으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그 생각과 행동으로 인함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는 자기 안에 있는 그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를 자기 맘대로 심판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선악과를 먹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보지 못하는 안목과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정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 때문이다. 생각과 행동 때문이 아니다. 생각과 행동 때문이라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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