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버지와 아들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삼으신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영이신 하나님,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왜 아들인가? 딸은 없는가? 또 아들은 있는데 어머니는 왜 없는가? 같은 의문들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또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다.
어떤 일은 볼 때는 정확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 봐야할 것을 보지 않으면 이상하고 의문스럽지만, 정확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고 너무 자연스럽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인치 나사와 미리 나사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끼워 넣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아버지인지, 왜 어머니는 없는지, 또 왜 딸이 아니라 아들인지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아버지가 있다. 누가 아버지인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아버지의 성격이나 또한 신체적은 유전도 있어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단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아버지의 존재 유무를 따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고, 아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아버지의 성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묻는 질문인 것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고, 또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는 형식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본성이나 의라는 무형의 내용이 아들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진 의가 아들이라는 생명이 같은 존재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는 사람인데 아들은 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아버지가 가진 의가 같은 생명을 가졌고 형식을 가진 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혈통으로 아들이 아니어도 자신이 가진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제자와 같은 이들 중에서 자신이 의도한 것을 잘 표현하는 이들을 보고 아들이라 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진 생각을 형식으로 실존으로 표현해내는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은 LOGOS이다. 이 LOGOS는 ‘계획하다’, ‘뜻하다’와 같은 의미의 어원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냄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형상)를 나타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와 법을 나타내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법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법이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것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8:15, 8:23, 9:4)에서는 ‘양자’라는 이해를 돕는 표현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법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삼으시는 법 어디에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것이 있는가? 다만 남자와 아버지라는 것은 혈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의라는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사람으로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육신으로 남자라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일 뿐이다.
어머니 하나님? 그건 본질을 모르는 소리
하나님이 왜 남자냐? 여자 없이 어떻게 아들을 낳느냐? 하는 의문은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지 의미 있는 질문이나 의문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사람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셨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들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사람의 모양은 본질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창조되고 관계를 또한 혈통을 이어가는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 의를 표현하셨기 때문이지 그 모양과 사람의 관계들이 본질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의 본질인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육신을 가진 삶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온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인생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하고 표현된 것만을 본질로 보다보니 엉뚱하게 ‘어머니 하나님’이라든가, ‘왜 딸은 없느냐?’ 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문을 가졌다가 그 해답으로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을 전혀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그런 의문을 가진 것만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표현으로 믿지 않고 그냥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른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는 문제의 해결에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역시 신앙의 본질을 육신의 문제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의에 관한 것이다. 육신은 그 의가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알지 못하면서 표현된 육신의 상태만으로 보는 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천하 만물을 보여주는 사탄을 경배하고 절을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면? 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면,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이단이라 비난하는 것도 웃기는 것이다. 어차피 본질을 모르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신 “주여! 주여!” 외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이 가진 삶의 본질이자 내용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 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릇을 채우는 것과 같고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로,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육신은 본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육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질이 되고 본성이 되므로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의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한 다들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이다. 교단 회의에서 싸우거나, 교회가 분열이 일어날 때 보면 정말 가관이다. 서로 자신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상대를 마귀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의 법정에 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다툼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것 외에 세상에서 다투는 이유는 절대로 없다. 그것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그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의 바탕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결국은 선악과를 먹은 생각이다. 그것이 교회를 위하는 것이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든, 영적 전쟁이라 하든 뭐라고 해도 다 선악과를 먹은 원죄의 열매일 뿐이다. 뿌리가 사과나무인데 배가 열리겠는가? 그런 생각이 표현되는 것은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선악과이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버지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본 모습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뜻과 의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내게 하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이 의(義)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가진 원래의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모습이고, 또한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나 부족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다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부인하고 더 나은 곳, 자기가 생각하는 더 나은 정체성으로 가려는 생각, 그것이다. 사람은 자손을 얻기 위하여 성욕이 있는데 이것을 목적과 본성에 무관하게 일괄된 욕구나 악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식욕이 없으면 죽는데도 먹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보다 무조건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성은 악한 것이니 더 나은 것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성을 넘어 하늘에 이르면 모든 인생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한 본성과 욕망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서 본 인간의 정체성이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려고 한 인간의 육신을 가진 모습,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육신을 가진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즉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온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강한 것에는 사랑이 없다. 강하고 위대한 것은 부럽고 열광할 수는 있지만 사랑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약함이 있어야 사랑이 있다. 위급을 피할 수 있는 주력을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에게 사랑이 느껴지겠는가?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신 것이 바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람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연약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음성은 사람이 들을 수 있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의를 나타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 의가 삶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위대하고 놀라운 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남루한 목수의 아들을 보니 어느 한 구석 경건하고 위대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 죽여 버린 것이다. 즉 인간의 연약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니 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 의 앞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며, 그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위대해질수록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그렇게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요 영광이며 아들이 된다는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는 의가 하나님의 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람의 부족함을 뛰어 넘어 위대해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모습,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삶으로 표현해 내는 본성을 가진 이가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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