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최근 안락사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한 분위기 환기를 시작한 것이다. 빈도가 당분간은 조밀하지 않겠지만 서서히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있을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국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의 동의가 마지막 관문이 될 게 거의 확실하다. 기독교와 불교라는 2개의 종교는 사실 상 우리 국민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안락사 주변의 이야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는 안락사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해보면, 역시 가장 핵심적인 건 죽음만 정해진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 그리고 이 문제의 절대적 우군인 ‘고통’을 견디는 게 삶이냐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는 대게 안락사에 관해 우호적인 입장인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통이라는 부분은 겪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개인화된, 그리고 모방이나 대신 경험할 수 없는 절대 영역이기에 함부로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한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될 수 있고, 그렇다면 자기도 찬성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그렇게 고통받는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게 될 것이라는 건 알지만, 문제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그걸 자의적으로나 또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가족의 결정에 의해 실행하는 걸 두고 자살이나 살인이라고 정의하는 걸 어떻게 이겨낼 것이냐는 게 문제다. 종교적으로 보면 그걸 사람이 이겨낸다고 해도 하나님은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게 더 핵심이다. 어쨌든 표면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보면 안락사는 분명 자살과 살인의 범주 안에 있다. 드라마나 누구나 공감할 법한 안락사 사례를 언론이 다루는 이유는 안락사만 핀셋으로 집어서 자살과 살인이라는 범주에서 빼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마음 한 켠에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앞서 말했듯이 이 문제는 결국 종교계의 동의가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앞에 있는 법적 철학적 그리고 의학적 관문들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의학세계에서는 둑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걸 우리가 느낄 수 있고, 의학적 저지선이 조금씩 흔들리자 법도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지금 2025년을 자기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세대 안에 이게 완전히 무너질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조명할 것인가? 모르긴 해도 언젠가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문제인 건 분명해 보이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걸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실지를 아는 건 아주 어려워 보인다. 그냥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생각은 거의 유추에 가깝다. 이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자살의 한 일면을 제기하려 한다. 바로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다. 우울증은 정신질환으로서 많은 경우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고 적지 않게 성공한다. 살면서 나와 가까운 사람 몇몇도 그런 선택을 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삼촌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었다. (죽고 난 뒤에 알게 됐지만) 그녀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평소에도 대화하다가 돌변하곤 했다. 그럼 그녀는 자살한 것인가? 아니면 암처럼 우울증으로 사망한 것인가?
나는 이런 사례는 자살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자처럼 사람이 자기 정신 세계를 주관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 통제 불능의 정신 세계가 육신을 사로잡아 가는 걸 자살로 볼 수는 없다. 암이라는 불량한 세포가 육신을 사로잡아 가는 걸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과 대비해 볼 때 자살로 규정할 수 있는 건 단지 죽음에 이른 표면적 행동 뿐이다. 하지만 그 행동이 원치 않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이건 자살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안락사를 이 공식에 끼워 넣을 수는 없다. 다만 사람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동은 모두 자살이라고 묶어둔 집합에서 특정한 명분으로 그 안에 있는 한 사례를 꺼내 오는 게 성공 가능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스스로 죽는 행동은 모두 자살이라는 단호한 주장에 아주 미약하지만 대응할 수 있는 너무너무 작은 명분이 생긴 것이다. 물론 우울증으로 인한 죽음을 자살이라는 범주에서 절대로 제외시킬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마도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사회 특히 종교계는 이런 식으로 논리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로 공부할 수 있고, 객관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는 가까운 근대 시절에 이혼은 절대 금기 사항이었다. 이혼은 곧 지옥이라는 금기가 있었다. 다른 영역도 아니고 안락사의 마지막 저지선이 될 기독교가 이혼에 대해 절대 바뀔 것 같지 않았던 가치관을 바꾼 경력이 있다. 당연히 이런 태세 전환이 이혼 문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그리고 그 시절 영국의 정치 상황과 결합되어 성공회라는 종파가 생기면서 왕이 교황과의 연결고리를 끊은 일도 그렇다. 그건 그 당시로는 절대적인 죄악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걸 정배로 수용하고 있다. 다름 아닌 종교계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르지 못할 어느 먼 훗날에 안락사가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걸 100% 부인할 수 있을까? 그것도 종교계가?
예전에 처음으로 화성에서 물의 흔적이 발견됐다면 생명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나왔을 당시 함께했던 목사님께 “다른 행성에 생명이 있다는 게 증명되면 기독교는 타격이 크겠군요”라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종교는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종교가 다른 분야보다 쉽게 태세를 바꿀 수 있다. 다른 분야는 공론이라는 게 지배하지만, 종교는 신의 뜻이라는 해석에만 접근하면 쉽게 피부색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안락사를 인간의 공통 문제로 부각시키고 공론화를 시도한 동력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일갈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죽음이 평안하다면 안락사는 단어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죽음이 가장 두렵지만 어느덧 사람들에겐 그 못지 않게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그럴 수 있다’라는 불안을 떨칠 확률적 명분이 없다 보니 혹시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막연한 기대에 정당한 명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이 안락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진짜 우리가 궁금한 문제, 하나님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안락사를 죄로 인정하시는 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에 관한 성경의 선명한 표현이나 말씀은 분명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일에 원리가 있다는 걸 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와 뜻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안락사도 인생에게 속한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의와 뜻으로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다.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곧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잠깐 복음적 원리를 언급하면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 성품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유일하고 전부인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안락사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뜻을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원칙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나 순교한 사도들을 본다면 우리 육신의 평안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엄청난 고난이고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가야 하는 게 우리의 본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게 있는데, 살아서 숨쉬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육신의 상태와 무관하다. 특히 하나님의 뜻은 고통받는 당사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백부장이 그랬듯 그걸 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고통이 있어야 복음적이라는 건 아니다.
정리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순간까지 삶이 유지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다면, 엄청난 고통 속에 살 때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행복한 시간을 살 때도 다 하나님이 뜻하신 일들이 있을 수 있다. 피조물의 소용은 창조주가 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는 게 대원칙이다. 이건 카멜레온처럼 요리조리 교리적 타협을 해 온 기독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그래서 요리조리 문제를 제기하고 균열을 시도해도 안락사는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건 쉽지 않다. 행여 사람이 아주 괜찮은 명분을 만든다고 해도 그건 호박에 줄 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수박이 되진 않는다. 사람이 만든 명분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녹아들진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안락사를 생각할 정도의 삶의 위협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신앙적 접근을 해야 한다. 출발은 순종이다. 주신 이도 여호와요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협을 줄여 주시기를 구할 뿐이다. 또 의지할 말씀은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도 잔을 피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런 말씀에 의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걸 장담하는 건 신앙이 아니라 만용이고 교만이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다. 물론 함께하심을 자기가 바라는 일이 자기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로 믿는 믿음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고난의 세월도 하나님이 뜻하시고 함께 하시는 여정이라고 순종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그 믿음 안에 있는 도우심, 그 뿐이다. 결국 안락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나 고통과 극심한 고문과 죽음 외에 다른 결말 없는 미래를 앞둔 상황에서 그 위협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심을 바라는 믿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대책 없는 원론이 이 문제의 유일한 답일 수 있다.
또 하나, 우리를 안락사를 주목하게 하는 ‘나도 그럴까봐’라는 두려움에 관한 다른 관점이 있다. 먼저 여기엔 약간의 위로가 될 부분이 있다. 바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확실한 일일뿐 아니라 확률도 낮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두렵다. 이 두려움 앞에 나는 예수님의 한 말씀이 생각난다. 이게 또 하나의 관점이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물고기 153마리를 잡아서 해변가에서 먹을 때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있었다. 그때 베드로가 물었다. “그(요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 21:22)
이제 안락사라는 묘한 관심사를 가지고 와서 이런 저런 말로 어지럽힌 방을 다시 정리하려 한다. 우리는 안락사를 포함한 피하고 싶은 인생의 여러 가정들에 대해 두 가지 관점으로 어질러진 방을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더 정확히는 있던 없던 하나님께서 내게 뜻한 삶을 충실히 살자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에 순종하자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그렇게 인생을 산다면 내 삶의 모든 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경영으로 마주한 일들이란 걸 알 것이므로 그때 걱정해도 된다는 것,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면 그 삶의 관성 안에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감당할 능력도 주실 거라는 것을 믿는 것, 이 두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