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상) 25.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우리가 흔히 쓰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은 초한지 유방과 한신이 나눈 마지막 지적 대화 속에 나온다. 왕인 유방이 한신에게 “나는 어느 정도의 군사를 다스릴 수 있나?” 물으니 한신은 “폐하는 기껏해야 10만 정도의 병사를 부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빈정상한 유방은 “그럼 너는?”이라고 물었을 때 한신이 “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답한 게 그것이다. 그러자 유방은 “그럼 넌 왜 내 밑에 있나?”라고 물었고, 한신은 “폐하는 나와 같은 장수를 다스릴 수 있고, 이는 신이 내린 능력이다”라고 답했다.
다윗이 블레셋을 이기고 지금 말로 승리 축하 퍼레이드를 펼쳤을 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자는 만만”이라고 노래했다. 이 말로 인해 사울은 다윗을 크게 시기하고 결국 죽이려고 마음을 정한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단지 시기만이 아니다. 그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한 이유도 크다.
초한지의 유방과 한신은 유방이 나름의 승자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울과 다윗은 다윗이 승자가 된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사울이 다윗을 전쟁에서 쓸 유용한 장수로 계속 인정했다면 결과는 나아졌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때 이미 다윗은 오래 전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하나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낙점 받은 상태였다.
이후로 사울과 다윗은 오랜 시간, 아니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 사울은 다윗을 감시할 목적으로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지만, 다윗은 도망자가 되고, 사울은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점점 미쳐가듯 다윗을 죽이려 한다. 사울은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지만 정작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며 오히려 아버지인 사울을 적대시하는 관계를 보인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를 이스라엘 역사의 한 단면과 정치적 사건으로 보고, 그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조명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궁에서 일어나는 왕과 백성의 지지를 받는 왕자의 친구이자 공주의 남편인 다윗과의 갈등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윗을 돕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게 본질이 아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법이 자아를 어떻게 이겨가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 관점의 정당성을 위해 다시 한번 우리 각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추구하며 살아가는 각자의 인생에서 왕이라는 걸 상기시키고자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안착하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한 땅으로 가는데 40년이 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데 3년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오순절 성령강림의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그냥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하니 즉시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모습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새사람이 내 삶을 주관하는 것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옛사람의 본성이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기름 부은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내 삶을 주관하는 왕이 되기까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사울의 마음과 치열한 싸움이 있다. 쉽게 표현하면 옛사람과 새사람의 지속적인 갈등이 있고, 그 길고 지루한 싸움 끝에 다윗이 왕이 되듯, 하나님의 약속하신 생명과 본성이 나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 사울과 다윗의 다툼은 정치 싸움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다윗이 이긴다는 표면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다윗과 사울의 갈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전환되는 전환의 상세 설명판이다. 사도 바울은 아주 간략하게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정죄함이 없다”라는 간증으로 표현했지만, 그 과정은 길고 긴 싸움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까지,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를 주관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의 의와 법이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의와 법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짐은 가볍고 쉽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법에서 너무 멀리 가 있기 때문에 돌아오는 여정이 필요한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갈등 속에서 사울의 아들과 딸이 돕는데,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고, 딸은 아버지의 형식이 육신이 된 존재다. 즉 내 안에 있는 나의 의와 삶의 양식과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내가 그리스도의 본성이 주관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을 돕는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다윗과 요나단의 눈물 겨운 이별처럼 결국 내 안에 있던 옛사람의 옳음과 이별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다윗과 요나단이 화살을 매개로 이별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여길 때가 많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다양성을 표현하기에 삶의 환경과 형편과 경험과 과정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나의 옛사람이 거듭난 새사람이 나의 인생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과 습관과 욕심으로 나를 주관하려 하는 각양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입하는 숫자는 달라도 공식은 일정하듯, 개인의 삶이 다양해도 누구나 새사람이 자기 삶을 주관하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의 세월을 보낸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 관점을 중심으로 조명해 보면 많은 이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