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사무엘 상) 20. 사울에서 다윗으로

김홍덕 2025. 9. 5. 07:49

(삼상 16:1-13)

사울에게서 마음이 떠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새로운 왕이 될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사무엘은 사울이 들으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하나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정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그 결과 이새의 막내 여덟 번째 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이르자 성읍의 장로들이 영접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새의 가족들을 제사에 참예하게 청했다. 그리고 그 아들 중에 하나님이 정한 사람이 있는지 보았으나 제사에 참여한 일곱 명의 아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없자, 이새에게 다른 아들이 또 있는지 묻고 이에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보고 머리에 기름을 붓고 떠난다.

 

성경에서 ‘8’ 혹은 여덟 번째는 몇몇 규례에서 성결함을 선언하는 수다. 대표적으로 아들이 태어나고 8일째에 아들에겐 할례를 행하고 동시에 출산한 어머니는 정결케 되었다. 또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이 될 때 7일간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거친 후 8일째 제사장으로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초막절과 같은 절기 역시 8일째에 거룩한 성회를 열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또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면 진영() 밖에 7일간 머물렀다가 정결케 하는 의식과 함께 공동체에 복귀하는 규례도 있다.

 

그러니까 ‘8’이라는 수는 온전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낸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이 다윗이 여덟 번째 아들이라는 걸 선명하게 말씀하신 것 역시 이런 성결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육신으로는 이새라는 아버지의 여덟 번째 아들이라는 모양이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사울이라는 하나님의 후회를 불러온 왕과 함께 성결의 과정을 거치고 온전한 왕이 세워졌다는 의미로 보기에 충분하다.

 

이는 우리가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왕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기에 충분하다. 사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까지 과정을 겪는다는 모두가 공감하는 경험적 간증과 상통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울처럼 자기의 뜻과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세월이 있다. 그러나 그 신념과 노력과 열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다. 사울은 그 교훈을 주는 모델이다.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왕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신앙이 끝나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을 끝내야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주관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삶이 끝났다는 걸 선언하는 게 번제고 세례며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사울에서 다윗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이를 말씀하고 있고, 다윗이 여덟 번째 아들이라는 배경이 이를 투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언급해 왔듯이 왕들의 이야기로 전하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 인생을 맡은 청지기이자 왕이기 때문이다. 사울이나 다윗 같은 여러 왕들은 그들의 행위나 생각이 우리의 이정표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자기 인생을 주관할 것이냐는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울은 출중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흔히 보는 영적 죄를 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자기 기준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다.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을 아주 사랑한 사람이었으나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은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이 함정을 대수롭지 않게 보기도 하고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기 힘들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창조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마치 가장 큰 효도는 자기 삶을 잘 살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잘 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막연하게 성경대로 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도하라니 기도하고, 예배 드리라고 하니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아니다. 그건 냉정하게 말해 노릇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는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회칠한 무덤과 같다. 영혼과 본성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데 행위와 모양만 하나님의 말씀을 흉내내는 것이다. 아주 잘해봤자 오스카상을 받는 연기자 정도일 뿐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건 아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사울이 더 큰 자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뜻이 내 생명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뜻이 본성이 되어야 한다. 본성이 되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살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본능적으로성경대로 살게 된다. 이 지경, 이 경지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온전한 세계다. 그렇다고 이게 아주 높은 신앙의 경지도 아니다. 거듭난다는 자체가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이 되어있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내 생명의 본성이 되어 육신의 삶을 주관하는 사람이 되는 게 거듭남이다.

 

사울은 실패했다. 이건 사울 한 사람을 향한 손가락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사울처럼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거나 섬겼다. 그런 섬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다. 사울은 우리에게 그것을 투영하고 있다. 사람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도 실패한다. 아니 실패해야 한다. 그게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머물면 그게 더 낭패다. 제대로 실패해야 그리스도의 계보인 다윗의 세계가 열린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