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13. 믿음과 사랑의 흉배, 구원의 투구
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이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는 재앙 같은 일이지만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낮에 속한 낮의 아들이므로 예수님의 재림이 고대하던 일의 성취가 된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건 제자리의 회복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낮에 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을 소망하는 투구를 쓴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피차 덕을 세우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히 여기며 화목하는 사람이 낮에 속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흉배와 투구라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서서 진리의 띠를 띠고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이라는 에베소서 6장의 말씀이다. 두 말씀 모두에 흉배와 투구가 나온다. 흉배는 정체성이다. 대제사장의 의복에 속하기도 하고, 군인을 방어하는 갑옷이자 병사의 보직을 표시한다. 따라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 또 의의 흉배라는 건 믿음과 사랑과 의가 낮에 속한 사람의 정체성이자, 우리를 지키는 갑옷과 같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믿음과 사랑은 군인의 소속을 표시한 흉배처럼 낮에 속한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믿음 자체는 물론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은 존재의 신 여호와를 믿는 것이고, 내가 성경을 지키는 공로를 쌓으면 육신의 복락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의 하나님은 바알이고,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흉배가 달라진다.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다. 상대를 위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랑의 표현은 대상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서로가 의미를 부여한 배우자 간에 헌신과 희생은 아름다운 사랑이지만, 자기 짝이 아닌 이성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불륜이고 음란이다.
특히 사랑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선후를 분명히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먼저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인데, 창조하셨다는 건 창조하시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목적이 피조물인 사람에겐 존재의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낮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된 사람이다. 그 관계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으로 맺어진다. 하나님은 내용이 되고 사람은 그걸 표현하는 육신인 관계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고 곧 사랑이다. 이걸 믿는 게 바로 믿음이다.
또한 구원을 소망하는 투구를 쓰라고 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한다. 머리는 삶을 주관한다. 그러니까 머리는 곧 의(義)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다. 따라서 사람의 의는 자기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 자체다. 이게 사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본질적 모습인 그리스도가 주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의(義)는 곧 구원이다. 존재로서 사람은 존재의 목적을 소망해야 한다. 특히나 사람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한 유일한 존재다. 그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희망이자 소망은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 목적을 소진하는 게 존재로서 완전함인 반면 목적을 상실하거나 알지 못하면 바로 버려진다.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살아가는지를 소망해야 한다. 존재로서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게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게 구원이고, 그 목적이 삶을 주관해야 한다. 즉 그 목적이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귀신 들린 자는 그 목적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소망하는 게 구원의 투구다.
결론적으로 저의 재림이 도적이 임하는 것 같지 않은 낮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낮에 속한 낮의 아들이다. 이런 사람이 되면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반갑고 기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재림은 절대 심판이 아니라 환희의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