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10.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많은 고난 중에도 믿음의 본이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재림의 소망을 전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재림의 소망을 전하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왜 바울 사도는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했을까?
사실 바울 사도 이전에 예수님께서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소녀는 죽은 게 아니라 자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당연하게도(?) 그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사람은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결말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람의 이런 보편적 시각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바울 사도는 이걸 말씀하고 있다.
사람은 신앙과 관계없이 내세나 사후 세계를 믿는 듯하다. 이 일반적인 믿음은 육신의 삶과 내세의 삶은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영혼의 능력은 육신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살펴 주었다'라고 생각한다. 죽는 순간 육신으로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반면에 성경의 관점은 다르다. 사람은 죽어서 다른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임을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며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다만 사람이 이걸 주목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죽어서 혹은 죽으면 천국 간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 육신으로 살 동안 다른 존재가 된 사람이 가는 나라지, 죽으면서 변화를 겪어 가는 나라나 세계가 아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나, 하나님은 살아 있는 동안 거듭난 새로운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육신이 죽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 다른 믿음이다. 사람은 죽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나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이 정하시고 원하시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받아 주신다. 이 개념을 이해, 아니 이런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존재가 아니면 '죽은 자'를 <자는 자>로 말씀하시는 성경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거듭남이고, 이 거듭남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되는 걸 말한다. 새 생명이 되는 게 구원이며,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즉 이 땅에 사는 동안 새 생명이 된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확정된 사람이며, 그도 자기 삶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이라는 걸 느끼며 산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보증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 9:27)
그러므로 거듭난 새로운 생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죽음은 종말적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일들에 연결되어 있다. 이미 산 생명이 되었으니 죽음에 갇혀 있을 수 없으니 부활한다. 그 부활의 때가 달력으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라는 건 분명한 약속이다. 그때 하나님의 섭리가 이어질 그때에는 우리가 자다가 일어나 일상을 이어가듯 하나님의 섭리를 이어갈 것이다. 이게 성경의 약속이다. 그래서 성경은 줄곧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 재림 때까지 영혼으로 떠돌며 방황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거듭난 생명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이기에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안에 속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본디 하나님의 본체인 것같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품에 이질감 없이 그 안에 머물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예수님과 함께 재림할 것이다. 이게 약속 있는 우리의 소망이다.
이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런 모든 섭리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존재 자체가 산 존재,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거듭난 새 생명이 되는 때는 육신에 거하는 동안이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 하셨기에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기 전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소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