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성경) 목사와 신학
오늘날 교회는 목사와 신학이 인체의 척추와 같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신앙은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검증하며, 교회에서 목사는 음식에서 소금같이 없어서는 안 되는 신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목사와 신학이 오늘날 누리고 있는 지위의 근거를 찾아볼 수는 없다. 성경을 지향하는 듯한데, 정작 성경에서는 그 지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게 그냥 성경에 나오는 것 이상의 지위를 누린다는 문제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문제는 이 둘의 지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을 그들의 프레임(혹은 기득권) 안에 가둔다. 그나마 그게 방향이나 옳으면 다행인데, 그것도 솔직히 장담하기 힘들다. 방향이 올바르다면 목사와 신학, 특히 목사에 대한 존경은 더 올은 가치로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목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목사들은 자칭 자신들이 사도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목사'라는 단어(?), 신분이 딱 한 번 나온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많은 언급이 중요성을 의미한다는 일반적 관점으로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더 살펴봐야 하는 건 목사라는 신분을 얻는 과정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는 극명하게 다른데, 성경 속 사도는 성도들이 사도로 인정한 상향식 임명이라면,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정도를 가려 우수한(높은)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시스템을 거쳐 나온 사람에게 이전에 그렇게 임명된 사람들에 의해 안수를 받는 하향식이다.
여기까지 제기된 성경에서의 언급 횟수나 임명 방식의 방향성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쉽게 용납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데, 목사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더 좋은 지위를 얻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나시기까지 낮아지는 복음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경쟁에서 이긴 사람(더 높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더 좋은 자리(큰 교회)를 주는 오늘날의 신분 정체성은 복음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복음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신분을 얻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신학은 더 어이없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가르치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게 기억나게 될 것이라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거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아는 일에는 신학 교수가 아니라 성령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과 거듭남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는 구원은 없다. 구원받았다면 그건 성령이 오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다 알게 된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는 이치로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난 생명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성령이 오신 것이고,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하는 게 정상인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그 거듭난 생명의 생명력을 알아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건 몰라서 공부하는 세계가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세계다. 그리스도가 되는 법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을 간증하고,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그 간증을 보증하며 알아가는 것이다. 이게 성경 공부고 나눔이며, 교회의 기능이다.
이 상황을 상식적, 논리적으로 조명한다면, 완성이 없다는 공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목사라는 신분을 얻어 성령이 오시면 모두 알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상황은 온전해 보일 수 없다. 몰라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있기에 아직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된다고 한 세계가 어떻다고 설교하는 상황인 셈이다. 예수님 말씀이 블러핑이거나 아니면 목사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이 이런 모순적일 수 있는 체계와 교리에 자기 영혼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평생을 그렇게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게 아닌데?"라고 말씀하시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린 오늘도 이런 위험을 안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 최소한 상황이 이렇다는 인식 정도는 있어야 한다. 자기 영혼을 방관할 게 아니라면.
그래서 목사와 신학은 나쁜 것인가?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누구나 전하는 복음을 사회적인 어떤 제도에 의해 얻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전한다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목사라는 신분은 우선 성경에 관해 사람들이 쉽게 귀를 열어 주는 특권이 있다. 이를 계기로 온전한 복음을 전한다면 목사 아니라 그 신분이 중이여도 상관없다. 이건 흑묘백묘론은 아니지만, 복음은 신분에 상관없이 전해질 수 있고, 또 전해야 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나쁜 것,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당시의 관습과 문화 등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과 말씀의 배경이 된다.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 걸 믿음이라 여기는 오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분명 그런 신학적 결과물은 도움이 된다. 아울러 고고학과 같은 일반 학문 역시 그렇다.
결국은 내용이 문제다.
목사라서 혹은 목사라는 신분이 문제라는 식의 전개는 좋지 않다. 목사가 되어 무엇을 전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렇기에 신학이라는 범주에서 경쟁해서 이긴 사람이 낮아지고 섬기는 복음을 전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주목하자는 이야기다. 목사라는 신분을 얻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든,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면야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이 예를 사도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본 받을 대상과 사례가 있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당시 최고의 학문을 수학한 사람이다. 당시의 학문은 성경과 분리할 수 없었기에 비유하자면 지금의 신학에 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 비교 대상도 안 되지만) 그런 자신의 이력을 바울 사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겸손의 교훈을 주기 위해 언급했다. 또 당시 최고의 신분인 로마 시민권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딱, 한번 사용했다. 그것도 로마에 복음을 전할 방법으로만 사용했다.
어떤 신분,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다. 그건 그가 어떤 존재인지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교회는 기복적이다'라는 말로 교회를 일반화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와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모든 교회라고 단서를 붙여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교회는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 설교하고 있다. 이는 다분히 목사가 신학이라는 세계에서 경쟁해서 이겨서 강단에 선 정체성 때문이다.
또 많은 신앙적 의문과 모순 속에 성도들이 갇혀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될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내어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부는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아는 사람은 가르친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신다고 했는데, 학교와 학위까지 만들어 공부하는 건 최소한 칭찬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모든 논점에도 목사와 신학은 건재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변명했듯이 일방적으로 부정할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복음은 목사만 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설교권 같은 건 없다. 복음을 전하는 건 생명의 본성이다. 생식과 같은 것이다. 누구라도 거듭난 생명이라면 그 생명을 퍼트리고 전하는 건 본성이다. 의무도 아니고 상 받을 일은 더더욱 아니며 특정한 사람만의 특권은 아예 될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만민을 위한 복음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는 구원과 거듭남, 무엇보다 거듭남은 성령의 직임이요 능력이며 역사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건 옵션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그렇게 성령이 오셨다면, 또 성령으로 인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속에 있다. 학문으로 공부할 일은 아니다.
목사라는 신분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력한 성과다. 그런 점에서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고, 또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므로 이를 잘 활용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신분 정체성이 어떻든 복음은 복음 그대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낮아지고 겸손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시려 한 이상 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사용된다면 목사라는 신분도, 신학도 버릴 건 아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아는 목사와 신학이 과연 그런지는 다른 문제다. 강단에 서서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설교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자고 말하는 게 과연 예수님과 같은 말씀인가는 누구라도 따져야 한다. 이런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건 그들 자신이 경쟁에서 이겨서 오른 자리에서 설교하기 때문이란 걸 숨길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아울러 우리에겐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자 거듭난 생명을 얻는 것은 성령이 오시면 되는 일이다. 몰라서 학문을 만들어 공부할 일이 아니다. 신학은 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성경을 보려고 한다면 뭔가 오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