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8. 더 풍성한 신앙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굳게 서면 자신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위로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관계가 깊었다. 이와 같은 마음은 전서 3장 후반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했다. 이번에는 신앙이 자란다는 것과 어떤 사람의 신앙이 자라는지를 이야기해 본다.
우리가 모두 인지하고 있듯이 신앙은 더 풍성하고 장성해야 한다. 우리는 풍성 특히 장성한다는 건 생명에 적용하는 말과 표현이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즉 신앙이 풍성해지고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란다는 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며,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장성함보다 거듭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장성함에 관해 데살로니가 성도들뿐 아니라 여러 성경을 통해 신앙이 자라야 한다는 걸 권면했고, 자기 자신도 푯대를 잡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르심의 상을 좇아간다고 말씀했다. (빌 3:14) 특히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이 아직 잡은 걸로 생각하지 않고 더 장성하기를 소망한다는 건 신앙인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신앙의 장성함은 생명에게만 있는 것이므로 장성함을 소망하려면 먼저 생명으로 나야 한다. 즉 하나님이 살았다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마도 신앙인 대부분은 자기를 거듭난 생명이라고 여기고 있을 텐데, 과연 정말 그런지는 따지고 봐야 한다. 특히 구원이 신앙의 종착지나 목표인지 아니면 출발로 여기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장성함은 무궁한 미래를 담보하고 있으므로 구원이 시작인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세계기 때문이다.
장성함은 구원이 신앙의 시작인 사람에게만 열린 세계
구원이 목적이냐 시작이냐는 생소한 개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신앙 가치관 전반을 지배할 수 있는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천국에 관한 생각으로, 대부분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걸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다. 물론 사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앙인으로서 선을 행하는 일을 장려한다. 하지만 그런 선한 일들도 천국에서 금면류관 같은 상급을 받겠다는 내심이 깔려 있다. 즉 장성한 열매는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을 속셈이다.
반면에 구원이 신앙의 시작인 사람은 세계관 자체가 다르다. 구원을 받았다는 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산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살아서 볼 자가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의 의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속한 삶을 살게 된다.
구원은 신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간다는 건 이 땅에서 고생한 삶의 반전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던 삶의 연장이다. 이런 가치관 안에 장성함은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의 향연이자 장성함과 풍성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충만에 충만과 같은 모든 표현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간다. 시간이 주어질수록 사람이 나이 먹어 현명해지듯이 영적인 장성함을 더해간다. 이런 삶은 구원을 통해 생명을 얻어야만 가능하다. 생명이 아닌데 장성함이란 있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을 아주 칭찬했다. 그들은 지역 성도들의 모범이 됨은 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러했다고 칭찬했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가 전한 복음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은 온전히 믿었다는 건 온전히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거듭난 성도들이기에 그 생명의 풍성함을 기원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했다는 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온전히 거듭난 생명들임을 아는 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관점은 나는 어떠한가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나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닌지, 구원을 신앙의 시작으로 보는 온전한 관점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데살로니가 전서 4장 이후와 같은 삶에 대한 권면은 또다시 노력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