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성경) 영성 훈련
존재론적 신앙은 '행위는 무관하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존재로 설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걸 전하면서 많은 도전을 받은 논쟁이다. 대표적인 게 여러 차례 언급한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해도 괜찮단 말이냐?"다. 사실 이 반문은 거듭난 세계를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거듭난 생명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성 훈련은 사실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거듭나면 노력과 영성 훈련이 무의미한지에 관한 고찰은 존재론적 신앙 안에서 중요한 문제다. 이 주제는 거듭난 사람들끼리의 대화 주제지만, 이 문제 역시 불분명한 신앙적 사안이므로 선제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영성 훈련은 거듭난 생명에게도 필요하다. 사도들도 성경의 여러 서신에서 분명히 권면하고 있다. 영성 훈련은 우리 신앙의 자세인 게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훈련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훈련해서 수영할 수는 있어도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하고 훈련해도 장비 없이 날 수 없다.
훈련으로 자랄 수 있는 생명의 본성이 있어야 훈련으로 자랄 수 있다.
훈련으로 성장하려면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본성이나 역량이 내재해야 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DNA가 훈련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훈련으로 물속에서 숨을 참는 시간을 다소 늘릴 수는 있지만, 훈련으로 물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는 건 우리 유전자가 그렇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훈련 역시 자라날 영적 본성이 있을 때 의미가 있고, 장성할 여지가 있다. 애초에 없는 걸 훈련으로 장성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라'라는 말씀으로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해서 예수님의 성품에 가까워지도록 장성하라는 말씀인데, 장성한 그리스도가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로 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를 수는 없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유전자가 없는 생명이 물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성품들, 기도와 성경을 아는 것과 지혜와 삶의 경건은 모두 훈련과 노력으로 자란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성품들이 장성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다만 이런 성품들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의 성품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훈련해도 장성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겪는 실패에 더 각성하고 다른 다짐과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는 걸 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덤 같은 부정한 자기 행위를 감추려 회칠하는 것과 같다. 10년 전에 했던 음란한 생각을 오늘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노력한다고 횟수나 주기가 개선되지도 않는다.
성경대로 살려고 행동으로 노력하다 겪는 실패와 반복은 영성 훈련이 아니라 자기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것.
이는 행위를 의롭게 하려는 노력과 실패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며, 단지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다 실패한 것일 뿐이다. 율법적인 신앙은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신앙이므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신앙인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실패와 반복은 훈련이 아니라 성장도 회복도 없는 노릇과 외식일 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성 훈련은 성령으로 거듭난 영이 있는 사람에게 의미와 효과가 있는 것이지 행위를 의롭게 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나야 영성 훈련을 통해 더 그리스도다워지고 장성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지,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걷기까지 수백, 수천 번의 실패를 극복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중요한 건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본성에 따라 걸으려고 하는 것이며, 또 아기가 걸으려고 노력하다 넘어진다고 해서 개나 고양이가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그리스도로 장성하는 과정에서 겪는 실패와 실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율법적인,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인은 자기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지나 않을까 항상 염려한다. 행여 그릇된 행위가 있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 믿는다. 그래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해 달라'라고 기도한다. 자기가 지은 줄로 모르는 죄를 어떻게 시인하고 자백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처럼 성경대로 살려다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에서 늘어나는 요령의 성장은 영성 훈련이 아니다.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 없기에 결론적으로 타협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을 모두 지키며 살 수는 없다. 단지 노력할 뿐이다.'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영성 훈련은 중요하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로 자라기를 힘써 노력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답지 못한 일,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부족했던 일을 돌아보고 내일 다시 그런 상황에서는 더 그리스도답고 하나님 아들답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영성 훈련으로 자란다는 걸 스스로 알아 …
겉으로 보기에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모습 같아도, 영성 훈련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노력이므로 생명의 과실인 열매가 있다. 또한 어제와 다르다. 날마다 새롭다. 어제는 넘어졌지만, 오늘은 걷게 된 아기처럼 어제는 하지 않았고 하지 못했던 그리스도다운 모습으로 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안다. 다만 이 모든 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