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6. 고난과 바꿀 수 없는 복음의 존귀함
데살로니가 전서는 3장까지 바울 사도의 칭찬이 이어진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고 있음에도 다른 교회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걸 높이 사고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건 성령의 능력인 동시에 복음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라는 보증을 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난을 이겨낸 바탕에는 바울 사도 일행을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로 대한 마음이 있다. 한편 바울 사도 역시 사도로서 대접받는 게 무례한 일이 아니지만 바울 사도 일행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런 상호작용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고난을 이기게 했고,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관계로 만들었다.
이는 바울 사도의 공치사가 아니다. 고난을 이기고 본이 되는 좋은 신앙의 시작은 복음을 받는 자세와 밀접한 영향이 있다. 당연히 복음을 귀하게 받들어 받으면 그 귀한 마음만큼 귀한 믿음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복음을 귀하게 받지 않는다면 귀한 믿음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십자가의 구원이 이를 증명한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을 각성시켜 구원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몸소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심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건 복음을 전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에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 사도와 동역자들을 그렇게 대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보다 분명 복음을 귀하게 여겼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 역시 고난보다 귀하게 여겼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그리 귀하게 얻지 않는다. 교회에 가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정확히는 착각이지만) 종교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면 오히려 대접받고, 얼마 가지 않아 마치 교회에 다녀 주는 것처럼 주인 행세를 한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세태는 교회에 원초적 책임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목사로 한정하는 듯한 문화를 형성한 탓이다. 교회의 제도는 목사가 복음을 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구도 때문이다. 복음은 시스템적으로 전해진다고 생각하게 만든 교회에서 복음을 귀하게 여기긴 어렵다.
그렇다고 목사가 사도인 것도 아니다. 비판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제는 분명히 직업이다. 목사 역시 교회에서 직위로 군림하고 있다. 성도들이 신앙에 관해 의문을 가지는 자체를 차단하고, 성경과 신앙에 관해서는 자기 의견을 따르라고 가스라이팅하고 있다. 심지어 주보에 다른 신앙적 관점과의 접촉을 경고하기도 한다. 성도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도록 밝히 말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천지 금지 포스터를 당당하게 교회 곳곳에 붙이고 있는 건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소 장황했던 현실 풍자적 이야기들의 주제는 사람들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목사의 설교는 제도의 일환이고 심지어 직업적 행위로 인식될 뿐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복음을 깨닫고, 얼마나 간절하게 전하려고 하는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는 복음의 귀함을 알 수 없다.
성도들,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관심은 교회가 말하는 신앙을 이용하고 기생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생각뿐이다.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녕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말에 성공과 안녕에 대한 자기 소망의 명분을 기대고 있을 뿐,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릴 정도로 귀하고 값진 것이다. 원래는 복음이 아주 쉬운 것이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너무 적합하기에 사실 쉽고 가볍고 즐거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도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가볍고 당연한 게 자기 의로움으로 자기 인생을 살려는 사람의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멀고 어려운 일이 되었고, 그걸 돌리는 건 쉬운 게 어려워진 만큼 되레 어려운 일이 되어,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 회복될 정도의 일이 되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전할 지경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 어렵고 먼 길을 온 것이다. 원래는 쉬운 일이었는데,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자기 의로움을 좇아 사람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된 게 하나님의 뜻이다. 복음은 그렇게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몸소 어린 양을 잡아야 회복될 정도로 어렵게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여정을 거쳐 깨닫는 것이다. 성경은 그 돌아옴이 생명이 바뀌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걸 <거듭남>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은 가볍지 않다. 매우 귀하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면 이 귀함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시작된 복음이다. 이게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나? 이건 제도화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을 게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할 정도로 귀한 것이다. 그걸 전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과 바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깨닫는 사람 역시 자기 인생 전부와 바꾸어 얻은 게 복음이다. 밭에서 귀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다는 비유를 가볍게 여길 게 아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고 나면 복음과 바꾼 자기의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것이고 복음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렇게 깨달은 복음은 낮아지는 게 본성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자기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전한다고 고백한다.
바울 사도는 그 마음과 본성으로 복음을 전했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 귀함을 알았다. 그렇게 귀함을 알기에 고난과 바꿀 수 없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깨달음 복음은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어서 본능적으로 고난과 바꿀 수 없었다. 오늘 우리 역시 이런 복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만 이 복음은 그 귀함을 모르는 자들에겐 세상의 성공과 안녕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