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성경) 육신 (2)
하나님의 목적에 너무나 합당한 사람의 육신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대하고 강한 신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도 강하고 위대해질 때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하기만 한 신이 아니다. 오히려 위대하고 강한 하나님은 사람이 만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잘 알 수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을 때(왕상 19장)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지진과 불로 나타나셨지만, 엘리야는 만날 수 없었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도 하나님은 계셨지만, 그런 사람은 사람이 만날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는 건 곧 죽음이다. 육신이 견딜 수 없어서 죽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은 그런 위대함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에 만약 그런 하나님을 만난다면 창조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에 또한 죽음이다.
엘리야는 미세한 음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무한 능력 중에서 사람을 향한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의 역량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낮아지는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해 창조된 사람은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육신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에 더없이 훌륭한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만족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위대하고 강해질 때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지만, 위대함과 강함 속에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위대해지겠다는, 아니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강함이 곧 선함이라는 기준을 스스로 가진 것이다. 이게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강한 게 선하다고 판단하는 자기 기준으로 육신을 약하고 부정하다고 심판한다.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의 의도와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육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우리가 거하는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다른 건 선악과를 먹은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신을 하나님과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건 선악과를 먹은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즉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죄의 상태에 있는 것
이런 관점의 차이를 없애려고 예수님께서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주시면서 우리도 육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기를 바라신다. 말씀이 육신이 된 육신을 내어주면 그 속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난다. 이걸 보여 준 게 '향유 옥합' 사건이다. 그래서 '향유 옥합'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해질 거라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구리를 찌르니 물(말씀)과 피(생명)가 드러났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드러난 것이다. 이걸 보고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아들을 알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주니 속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 하나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다.
육신을 내어준다는 건 헌신한다는 것이며, 희생한다는 것이며, 대신 수고한다는 것이며, 내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의가 있어 의로운 사람인데도 세상 가치에 매몰된 사람의 주장이 옳다고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자 목적이며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며, 우리 육신의 사용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우리 육신은 온전하다. 우리가 늙지도 않고, 수고하는데도 힘들지 않고, 희생해도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건 슈퍼맨이거나 신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없어서 육신을 약하고 세월과 함께 쇠약해지게 만드신 게 아니다. 내가 가진 유한한 것으로 남을 섬기고 자기 옳다는 생각에 빠진 사람의 주장에 유한한 육신을 소비하고 내어주는 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고, 사람을 이렇게 창조하신 이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걸 보여 주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굳이 그랬다는 측면만이 아니다.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묘수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육신의 목적을 육신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육신으로 그대로 보여 주신 것이다. 낮아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그래서 연약해 보이고, 위대해져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보면 부정한 이 육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엔 너무 온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