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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4. 하나님께 합당한 삶

김홍덕 2025. 4. 29. 04:32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의 마음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모두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런 바울 사도의 마음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고, 전도자의 마음이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산다는 건 신앙인 모두의 소망이다. 여기서 한 부류는 제외해야 하는데 그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사서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 세상에서 평안할지 아니면 사도들처럼 고난의 삶일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지 그 결과가 신앙의 소망이어서는 곤란하다. 금도끼 은도끼를 바라고 자기 도끼를 연못에 던지면 안 된다.

 

어떤 합당함은 당연히 기준에 부합한다는 말이므로 그 기준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과 법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다. 의는 옳음과 그름을 가늠하는 헌법적 기준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의를 기반으로 나라의 옳음과 그름이 결정되는 걸 생각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 합당함을 결정한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아야 …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가 감춰져 있거나 비밀스럽거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세상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람의 역량에 맞추어 예비해 두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에 맞추어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순종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의지까지 사람에게 주셨다. 그리고 합당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의 본으로 아들까지 보내셨다.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의지 앞에 핑계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조각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조각하고, 리모델링하는 것, 이게 바로 우상을 만들고, 조각하고, 섬기는 일이다. 이건 불상에 절하는 것보다 교묘해서 자기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신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행위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강조하심에도 사람은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를 의로 여기는 하나님으로 믿는다.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우상을 조각하여 섬기는 일이다. 이 우상 숭배는 아주 굳어져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걸 깨우치는 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일 정도다.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나님을 조각하여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부터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선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는지부터 살펴보면,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생각한다. 행위를 의로 여기는 분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행동>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예배가 바른 예배인지, 불참하는 이유 같은 건 따지지 않고, 출석이란 행동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건 명백히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행위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거나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은 행위를 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는 신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이게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과 믿음이다.

 

사람들은 행위를 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는 신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를 거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정성이었다. 지금 드리는 십일조나 헌금은 당시에 드린 번제물이 차지하는 경제적 부담에 비할 수도 없는 정도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누가 저 성전 문을 닫아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너희가 나의 단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정성을 마다하시고, 싫어하셨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다는 것만으로 유대인의 신앙을 터부시하면서 지금 자신들은 율법 아닌 복음 생활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건 착각이다. 단언컨대 예수님께 책망받던 유대인들이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경건하게 살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행위가 아니라 존재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 존재 정체성을 의의 기준으로 보시는 분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그들이 신앙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는 걸 깨우치게 하는 건 매우 어렵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려고 엄청나게 노력함에도 자기 자신조차도 합당함을 자신할 수 없는 엄청난 괴리를 느끼는 근원적 이유가 하나님과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인데도 자기는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기에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노력할 뿐'이라며 자신조차 자기 삶을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만 있어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도 착각에 매몰되었기에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에게 어렵게 해 놓았을 리 없다는 단순한 상식만 상기할 수 있어도 문제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님에도, 하나님의 의와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은 어떤 행동들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다. 행동은 존재 정체성 혹은 본성에 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가 창조한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시고 긍휼하신 분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렇게 노력해도 이를 수 없는 기준으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정의하셨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뇌까리면서도 이 단순한 믿음 하나가 없어서 그렇게 소망하는 합당한 삶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나의 삶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건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아서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가야 한다. 대중적인 신상의 형태와 교리는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만약, 그 대중적이고 교리에 입각한 신앙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면 또 모르지만, 그 신앙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매일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 수 없다.

 

행위가 하나님께 합당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의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무엇을 의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주일 예배에 가지 않으면 화를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든 예배에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늙어서 병원에 입원하면 저절로 죄인이 된다.

 

하나님은 이런 행위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진, 완성된 예배의 제물인지를 물으신다. 내가 성전에 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떠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늘 거하시는 성전인지를 물으신다. 그렇게 하나님이 내 안에 DNA로 거하시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삶이 된다. 이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