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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1. 사랑과 소망의 능력

김홍덕 2025. 4. 3. 05:52

성경 데살로니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비교하면 칭찬이 아주 많은 서신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많은 핍박을 이겨냈고, 말로만 믿는 신앙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큰 확신을 가진 신앙이라고 칭찬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믿는 소망이 있었다. 다만 이런 소망으로 인해 일부가 재림에만 의미를 두고 현실의 무가치하게 여기는 잘못된 신앙에 빠진 데 대해 바울 사도가 두 번째 편지에서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내하는 소망을 칭찬했다. 이는 복음이 지향하는 바로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이 삶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이런 성도들의 모습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보증한다.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능력이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큰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

 

일반적으로 능력이라고 하면 초인적인 능력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는 거로 생각하지만, 바울 사도는 사랑으로 수고하게 하는 게 능력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인내가 능력이라고 말씀한다. 사랑으로 수고하게 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인내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하나님 능력의 뿌리는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다.

 

사랑의 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 위에 있다. 하나님과 온전하고 의미 있는 관계가 성립된 사람이 표현하는 헌신과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아는 사랑이다. 이는 사람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이성과 사랑하고 결혼한다. 관계의 의미 없이 이성을 만나는 건 매춘이고 음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도 이것인데, 자기 짝이 아닌 대상과의 관계가 바로 음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수고는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헌신적 수고다. 먼저 하나님의 관계가 정립된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온전한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이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특히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관계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이 행하는 수고는 당연히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행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수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헌신적 수고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순종으로 준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순종,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자 목적에 순종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러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한 자리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그 낮아짐과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낮아져서 섬기는 건 당연히 수고를 수반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빠질 수 없는 게 있는데 이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낮아짐은 신념과 노력이 아닌 낮아짐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냐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칭찬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인 사랑의 수고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낮아진 마음으로 섬기는 본성으로 거듭난 생명의 삶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따라서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사랑의 수고가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섬김의 삶을 소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망의 인내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를 바란다는 말로 어렵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망에 대한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다. 세상의 삶에서는 사지 않은 복권의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웃지만,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창조, 존재 목적과 무관한 것들을 마구 소망한다. 당첨을 바라면 복권부터 사야 하듯,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법과 뜻 안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

 

또한 소망은 자기 정체성에 종속된다. 양에게는 썩은 고기에 대한 소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생명,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말씀하심은 우리가 되어야 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

 

이 예수는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가 소망하는 예수는 평안과 풍요를 약속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평안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봐도 예수님은 풍요의 아이콘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평안과 풍요를 소망하고 간구하는 건 의미가 없다. 간구한다고 해도 예수님은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건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아시는 세계라고 일갈하셨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풍요와 평안을 소망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그리스도다. 당연히 그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필요로 만든 우상이다. 소망은 정체성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세상의 풍요를 먼저 구하는 사람은 세상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는 건,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정체성을 소망한다는 것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이 칭찬한 소망이다. 즉 세상의 풍요와 평안을 구하는 소망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생의 목적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다. 그건 곧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구하는 소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구할 건 하나님의 뜻이지 세상의 풍요와 평안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소망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확증한다. 이 소망은 세상에 속한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스스로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는 예수와 같은 본성을 소망한다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소망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