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성경) 죄 사함 - 2
죄 사함은 인생의 목적 회복
사람들에게 죄 사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의 회복이라는 게 생소할 것인데 이유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죄를 존재가 아닌 행위적 측면으로 확신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생의 목적을 자기가 정하기 때문인데, 그마저도 종국에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고백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고백한다는 건 그나마 솔직한 인생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 존재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보여 주셨다. 그게 보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로 인해 사해졌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십자가는 그리스도 구원의 핵심이라는 걸 안다. 십자가로 인해 모든 인생이 구원을 얻었다. 이건 명백하다. 그렇다면 죄 사함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십자가의 의미도 달라진다. 잘못되고 범법한 행동이 죄라고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단지 형벌이다. 죄는 내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은 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건 기독교의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고착된 사람의 생각이다. 일반화된 이 교리는 늘 '수천 년이 지난 오늘 내가 범하는 죄를 미리 아시고 미리 사하셨단 말인가?'라는 도전을 피할 수 없고, 그 도전은 자연스레 '그렇게 미리 속죄할 게 아니라 죄를 예방하면 되지?', '하나님이 그만한 능력도 없는가?'라는 외통수에 걸린다. 그러니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법은 이렇게 허술하지 않다. 온전하신 하나님 아닌가?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건 우리 대신 받는 형벌이라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모습을 이끄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존재 목적이 그 모습이라는 걸 깨닫는 게 회개고 구원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든 놋뱀처럼 자신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모세 시대에 놋은 거울이었다. 그러니까 놋으로 만든 뱀을 볼 때 구원을 얻는다는 건 자기 모습이 뱀과 같이 하나님이 되려는 존재라는 걸 발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의 표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과 달린 모습 그리고 부활과 승천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회복해야 할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모습이자, 하나님의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란 뜻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회복할 정체성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대로 나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이 회복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가 사해진 것이다. 이건 다시 회개할 필요 없는 온전한 관계 회복이다.
죄 사함을 이렇게 온전히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의 회개는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고, 하나님께서 다시 죄를 생각하지 않는 흠 없고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이탈한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더 이상의 회개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 만약 이게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면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가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정체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렇게 죄 사함이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걸 알면 발을 씻는 것과 몸을 씻는 것의 차이도 분명하다. 이건 아주 중요한데, 우리가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법을 설명하고, 또 어떤 회개를 할 것인지도 아울러 설명한다. 정체성의 회복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사람이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건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이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은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그의 삶의 본질이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뜻, 창조 목적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아들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끊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유전적으로 그럴 수 없다. 이런 완전한 회복이 바로 하나님 앞에 얻는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여 돌이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게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단번에 드리는 제사요, 모든 죄를 도말하신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나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아 살아가는 죄라고 하심을 알고, 그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로 안다면 우리는 다시 회개할 일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죄 사함은 바로 이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함이고, 구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행위를 보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이 늘 법을 어기고 불순종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걸 상기시킨다. 행위로 인한 죄책감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 않는가?'라고 염려한다. 심지어 '이건 구원파의 논리인가?'라고 걱정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염려를 미리 아셨다. 베드로가 발 씻기기를 거절할 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목욕했다는 건 성경적으로 정결케 했다는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결은 존재의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란 죄 사함은 더 이상의 회개가 없다.
발을 씻는다는 건 행동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걸 비유하자면 아버지와 아들의 불변적인 유전적 관계는 목욕한 정결이고, 아들이 이런저런 행위로 아버지께 불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이 행위로 지은 불순종으로 아버지와의 불변적 관계를 헤칠 수는 없다. 그런 법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들로 거듭나는 게 이만큼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럼 아들이기만 하면 서슴지 않고 악행을 범해도 되느냐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으로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도둑질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걸 일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낮아지는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악행은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생명은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가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은 악행을 자행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나기만 하면 악행을 저질러도 되느냐?"며 질문하고, 염려한다. 이건 아주 확실한 증거다. 진정 자기가 거듭난 사람인지 가늠하는 증거다.
발만 씻으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난 삶을 살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 불순종에 대해 회개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부족했던 것, 미흡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을 돌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존재에 관한 회개가 아니라 좀 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난 죄의 회개와 전혀 다르다. 거듭난 삶을 살아보면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범했는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게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어떤 회개를 해야 하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모습이라는 걸 알고, 그 모습이 나의 인생이 되기를 고백해야 한다. 그게 죄 사함이고 온전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