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성경) 성경이 회색이던 시절
<개와 늑대의 시간>, <방 안의 코끼리>, <낭패를 당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말은 언뜻 성경과는 무관한 말들처럼 보인다. 분명 성경을 이야기할 때 자주 사용하는 비유나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가 오늘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상태?, 마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고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자기가 믿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믿는지다. 물론 어떤 세계든 모든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삶을 넘어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까지 포함된 것인데, 그냥 대충 믿어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밝고 분명한지, 자기 신앙이 선명하고 의문스러운 거 없이 만족스러운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모태신앙인 나의 경험상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랬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앙에 깊이 몰입했다. 10대 소년 시절의 열심을 깊이 몰입했다고 하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그 이후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될 때까지 결론적으로 가장 열심이었던 건 교회 생활이었다. 하지만 많은 의문들이 있었고, 그 의문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신앙에 대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해야 "됐다!"’ 싶은 생각이 들까?’라는 의문이었다. 중3 때부터 주일,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난 다음 한참 형인 대학부 형님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 들어가 길게는 거의 2시간씩 기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버스가 사고가 나서 지금 죽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답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언제까지’, ‘어디까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런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부는 정말로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조의 리더가 되었다. 토요일에 있었던 대학부 모임의 성경 공부 모임 30분을 위해 내가 준비한 시간은 최소 2시간이었다. 그때까지 간간이 하는 성경 퀴즈 대회에서 1등을 놓쳐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대회에선 사회자가 나에게 “지금 남은 문제를 2등이 다 맞춰도 역전이 되지 않는다”라며 더는 답을 맞추지 말라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의문이 있었다. 이건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나의 의문은 대학 졸업 후 군 생활에서 결국 임계점을 넘어섰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새벽 점호 전 잠깐 일어나 기도하면 그날은 평안한 듯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꼭 고참들의 집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그럼 기도 열심히 하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나의 상태가 자유롭지 않고 기도해야만 뭔가가 담보되는 구속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은 나를 괴롭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와서 나는 그때 ‘피곤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기도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도 회색 성경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예수를 잘못 믿고 있거나, 예수가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로 생각했다. 물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한 사람을 만났다. 목사였다. 그의 말씀은 그때까지 내가 듣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이 잠겨 있던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 신앙은 Do에 관한 것입니까? Be에 관한 것입니까?”
나는 목사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Be에 관한 것이지”라고 답했다. 어느 지경까지 해야(Do) ‘됐다’라는 생각이 들지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그건 나에게 아주 신선한 접근이었다. 그날 이후 19년 이상 나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주었다. 그를 만날 때 29살이었는데 그때까지 의문은 거의 해결되었었다. 그건 분명 성경의 본질적 복음이었다.
하지만 또 깊은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고민은 이전과 달랐다. ‘복음과 율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복음이 율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나는 그 목사님과 이별했다. 귀한 복음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문제는 그 복음이 아주 낮아지는 거라는 것이다. 귀하고 귀한 것을 얻고 보니 낮아지는 것이었는데, 그때까지 그 목사님과 함께 우리집에서 시작해서 일군 교회가 그렇지 않은 길로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블로그에 복음을 설명하는 일을 시작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찾아 와 만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만남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좀 적극적 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변곡점일 수 있는 지점에서 내가 고민했던 것, 그리고 순례의 여정을 거쳐 벗어난 회색 성경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글은 자기 신앙이 만족스러운 사람이나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 외 다른 접근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글이다. 그러나 적어도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는데 왜 회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쩌면 진정한 구원의 세계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려면 아브라함처럼 지금껏 믿어 온 아비 집을 떠나는 믿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