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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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으로 예수님의 온전한 제사를 믿는 삶을 권면한 모든 주제를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에 자시 한 번 제사와 특별히 제물에 대한 말씀이 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고, 그 제단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먹을 권한이 없다는 것과 그 이유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제사의 규례에 관한 것인데, 일반적인 번제의 경우 제단에 태운 제물 외에는 장막에 종사하는 이들이 먹을 수 있지만,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그 육체는 먹지 못하고 모두 불사른다는 대속죄일의 규례(레 6장)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연결하고 있다. 


이는 대속죄일과 모든 속죄의 제사는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레위기가 앞에 있으니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희생이 먼저고 모든 제사는 그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하신 말씀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말씀을 히브리서의 마지막에 인용하면서 이 말씀을 읽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성문 밖, 예루살렘 밖은 신앙의 영역 밖으로 인지된다. 이방인들의 세계나 정결하지 못한 이들의 자리로 인식된다는 의미다. 문둥병이 들면 성문 밖으로 나가 있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을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영문 밖으로 가자는 권면은 결국 세상으로 나가자는 말씀이다.


이것은 갑자기 등장한 말씀이나, 급격한 흐름의 전환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가치관은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에 예수님이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이긴 자, 경쟁에서 이겨 높은 곳에 올라 간 자가 선한 자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가치로 이겨서 왕이나 영웅과 같이 높고 화려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로 인하여 예수님이 능욕을 당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골고다라는 십자가의 자리가 성문 밖이라는 외형이 본질이 아니라, 바로 그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지자는 의미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신앙이 여기서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 삶의 시작이고 그 삶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신 사건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이 되자는 말씀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본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세상의 가치 앞에 예수님이 자기 육신을 드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니 그 드린 모습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아들로 드러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의가 형식이 된 것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의미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식이 된 것인데, 그 육신이 깨어지니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므로 아들임이 드러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육신 가진 사람을 조성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이자 사람을 지은 목적은 세상의 가치 앞에 자신을 내어 줄 때 나타나는 것임과 동시에 높아지고 이긴 자가 선하다는 세상의 가치 앞에 수고하고 제물로 내어주는 그 자체이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나를 내어주는 자리로 가야한다. 그곳이 바로 영문 밖, 곧 세상이다. 세상으로 가야 세상의 가치에 종이 될 수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질수록, 예수를 믿을수록, 또 자기 영성이 높아졌다고 여길수록 세상에서 멀어지려 한다. 따로 모여 살아야 한다며, 산이나 깊은 곳에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 들어가서 살려고 한다.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과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분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그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겠다는 것이 기독 신앙의 목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문 밖으로, 세상으로 가서 그 악함 앞에 자신을 내어 주셨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이 악하지 그것을 멀리하겠다고 따로 자기들끼리 모여서 있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대속죄일에 제단 위의 것을 먹을 권한이 없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며, 서로를 먹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 앞에 나를 내어주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는 의미다. 성도들끼리는 그 삶을 서로 위로하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이 온전한 것임을 서로 보증하는 것이지,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가 나서서 “내가 세상의 종이 되겠노라”할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끌려 간 자리를 사람이 용기 있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으니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나 그것은 예수님 곧 하나님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려는 군병 앞에 순순히 끌려가신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를 당연히 영문 밖으로 끌고 같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자기 의도와 달리 늘 세상의 주장 앞에 종이 되는 모습에 순종하는 모습임을 보게 되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이 악하니 그것과 분리되려 하고, 세상과 격을 지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그 악한 세상에 속해서 살면서 그 세상의 가치가 나를 끌로 가고, 종으로 삼고, 내 육신의 수고를 요구할 때 내 안에 본성이 순종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힘 입어 온전히 예수님과 같이 거듭나 그에게 나아가자는 히브리서의 권면의 기반 위에 이 말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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