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된 익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의인의 믿음은 심판을 받는 자들의 교만과 대칭점에 있다는 점을 먼저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다. 심판을 논하는 중에 믿음이 있는 자가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만한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일반적으로 교만은 육신의 지위나 재물의 정도와 같은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과, 또 가진 것 이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기 때문에 교만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16:5)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의인이라 여기거나 교만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교만을 생각해 봐야 한다.

 

교만이라는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대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때 예수님의 모습도 겸손이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많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지극히 겸손한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교만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일을 지극히 겸손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2:6-7)

 

이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다가 또 한편으로 부모를 버려두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말씀같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가치관의 세계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모순이 아니라, 표면상 말과 표현은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가치관으로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교만이라는 것이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자신을 스스로 높인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동일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육신에 관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을 기준으로 교만을 논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에 관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을 기준으로 교만을 논한다.

 

사람은 육신이 가진 재물이나 능력이나 가치를 스스로 가졌다고 자랑하며, 그렇게 가졌기에 또 스스로 높은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정체성, 존재의 목적을 기준으로 교만을 이야기 하신다.

 

물론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난 피조물인 사람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것처럼 자랑하는 모든 것이 교만이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분의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피조물이 창조의 의도대로, 창조한 목적과 뜻대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 나거나 조성한 인생이 아닌데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목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장 큰 교만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교만에 대하여 특히 터부시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뿐 아니라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처럼 되려고먹었던 그 마음도 목적을 기준으로 교만에 해당하고, 성경이 말하는 도둑질 역시 자기가 조성하지 않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사람의 인생 전체가 교만이다. 이는 목적이란 관점에서 보면 목적을 이탈한 것이다. ()라는 말이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말인 하말티아에서 온 이유다. 즉 사람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가 모두 죄다. 숨 쉬는 자체가 죄다. 따라서 심판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사람도 자신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거나 사거나 또 용역을 구매했는데 그것이 목적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큰 싸움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인생을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교만은 죄고, 죄기에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능동적으로 벌하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과 다른 목적으로 산다는 자체가 괴롭고 힘든 일이기에 그 자체가 심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심판하시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간첩으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그 자체가 심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삶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닌 삶을 사는 이들 서로를 늘 심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심령에 있는 낮아지므로 이기는 본성, 낮아지므로 얻는 가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더 낮아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그것임을 보이셨다. 그에 반해 사람들이 스스로 정립한 자기 인생의 목적과 가치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언제나 높아지는 것에 있다.

 

당연하게도 높은 곳은 자리가 좁다. 누군가를 이겨내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곳이 높은 곳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낮아질수록 땅은 넓고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높아지려 하므로 서로를 이기려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긴 자가 되어야 하는 기준을 스스로 정한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은 괜히 정하는 것이 아니다. 선을 장려하고 악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조성하지 않은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는 교만으로 일어난 악순환이다. 사람이 그 속에서 헤매는 것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며, 바른 방향이 아니니 어둡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자기가 조성하지 않은 자기 인생의 주권을 스스로 가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만이며, 이는 선악과와 죄 이 모든 것과 뿌리가 같다. 그리고 그 교만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스스로 높아지려고 동일한 세계에 있는 서로를 늘 심판한다. 그렇게 교만한 자들은 늘 심판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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