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장 13-21절) 우리가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14. 07:19 Writer : 김홍덕

사도 요한은 이제 서신을 마무리 해 가고 있다.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형제들에게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먼저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과 끝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영생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 일서의 앞부분에서 영지주의에 대하여 경계를 했던 내용의 결론이다. 요한 일서는 먼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 육신으로 오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함으로 육신을 부정하는 신앙에 대하여 경계한 것이다.


이러한 요한 사도의 의도는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고 실존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되나 하나님의 법으로는 아들이 되는 것을 알게 하심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귐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고 사귐이 있는 삶이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삶이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에 목적과 의도가 수용된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살아 있고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되는 법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사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사랑은 존재의 이유를 알게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수고와 희생을 치르며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는 참 사랑을 전하심과 같이 계명을 지키는 삶, 곧 사랑하는 사람의 삶 역시 다른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수고와 희생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형제가 궁핍한데 재물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들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일서의 전반적인 흐림은 일관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요한 사도가 가진 개인적 신앙관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 예수님을 만나고 전하는 모든 사도들의 말씀이 하나 같이 이것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에는 육신이라는 형식만 중요하게 여겨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과 반대로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며 형식을 포기하는 영지주의가 만연했다.


이러한 신앙들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내용이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둘 다 어긋난 것이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심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있고 그것을 알게 하심이며, 내용이신 하나님이 형식인 사람의 삶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하나 되는 것이고, 사귐이며, 구원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풍조는 초대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신앙도 그러하다. 이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대하여 경계해야할 이유가 없다면 그런 말씀이 이 시대로 전해질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이 시대의 신앙도 잘 살펴보면 그 두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말로 세상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용과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그렇고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 그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스마트폰은 하드웨어라는 형식이 있고, 통화나 정보의 전달이라는 목적이자 내용이 있고, 사람이 만든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목적과 쇠로 만든 차체가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죽은 것이라 한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 전화가 되지 않는 휴대폰, 그런 것은 다 죽은 것이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사람이 만든 물건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그 법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인생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창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의 삶에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도 의학적으로 아무리 살아서 숨 쉬고 멀쩡해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죽음과 사망의 실체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육신이라는 형식이 어떤 내용과 하나가 되어야 살아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표현하고 내용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 사람의 존재 목적인 내용과 육신이라는 형식이 사귀고 하나가 된 사람을 하나님은 아들이라 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되어야 할 내용,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다.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도 왕도 될 수 없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 사람의 모습인 것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율법주의 곧 내용은 없고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인이고, 십자가에서는 잠깐 기절했고 마술 같은 것이라며 형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사람의 육신이 가진 욕망과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도 만연한데 지금도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이 완연하고, 반대로 세상은 종살이라며 무조건 떠나고 배척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은 대충 살아도 신앙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에 뿌리를 둔 신앙들이 만연하다.


하지만 요한 사도가 전한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경계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사귐이 있는 사랑의 상태를 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시작했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고 한다. 사람도 호흡과 육체가 하나로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숨 쉬고 산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이름, 곧 사람이라는 유전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표현하자면 사람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내용이자 목적이며 존재의 이유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된 삶이 살아 있는 삶이다. 그 삶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밝히 안다. 사람이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것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유전자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창조의 목적이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사람은 존재 목적을 이탈한 죄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당연하고, 그 상태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임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당연하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기록에 남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모르고 그 삶을 살겠는가? 고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이 영생은 사람이 영원하신 또 시간적으로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목적을 아는 세계에 속하고 하나 되는 것이 영생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와 세계 안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영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의 영원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한 것은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금할 수 없게 표현되고 아는 것이다. 병아리는 포식자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안다. 그것이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의 내용으로 하나가 된 생명 있는 삶은 범죄도 않고 하나님 안에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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