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1:1-7) 메뚜기 재앙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7. 11:59 Writer : 김홍덕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으로 시작된다.

그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런 일이 열조에게나 이 일을 당하는 세대나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특히 이 일에 대하여 늙은이를 언급한다. 늙은 사람이란 나이로 늙은 사람이 아니라 과거를 가진 사람이다. 미래보다 과거를 많이 가진 사람이 늙은이다. 


과거를 가진 늙은이라는 특정한 부류를 지정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메뚜기 재앙이 경험되지 않은 놀랍고 심각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땅에 거하는 거민들도 늙은이와 함께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이 땅에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강조하시는 메뚜기 재앙을 이야기 해 보자. 이것이 요엘 선지자 시대 어느 날에 팟종이, 메뚜기, 황충이 하늘을 덮듯이 날아와 모든 식물을 먹어 치운 한 사건에 관한 것인가? 


만약 그런 병충해 같은 하나의 재앙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일을 이방 열국에게 갚으시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요엘 3장에서 말씀하시는 회복의 내용은 제사와 포도주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방을 심판하고 찾아 오시는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메뚜기 재앙의 결과, 즉 메뚜기 떼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상하게 하므로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제사, 곧 하나님 섬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심에서 이것은 단지 농사를 망친 재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메뚜기 재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메뚜기는 <요엘서의 구조와 주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다함의 상징이다. 홍수와 비슷한 개념으로 특히 구분된 각각의 개체가 셀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수를 상징한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보면 <과반수>의 힘과 같다.


바로 많은 교단, 교파, 교회와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교세를 가지고, 그 수를 가지고 자기 신앙의 선하고 온전함을 치장하는 모습이 바로 메뚜기 떼와 상관이 있다. 생각해보면 정통과 이단을 다루는 것도 신앙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 수의 중다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순복음 교회가 이단에서 벗어난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통이라 주장하는 신앙인들이 쉬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의 많고 적음이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은 비단 정통과 이단의 논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교단이나 종교 자체의 온전함이 교인의 수로 결정되듯, 개별적 신앙 역시 많은 수가 믿는 신앙에 속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의가 옳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신앙이라 믿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고 싶은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란 이해되지 않는 것을 신념을 가지고 가능할 것으로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 해도 너무 분명한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의 근원이 자신 안에 있는지, 아니면 밖에 있는지는 결정적인 요소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사람의 죄를 사하는지 이 시대적 상식이나 과학으로 이해되지 않으면서 단지 자기 밖에 있는 <다수의> 신학자가 말하는 것을 신념으로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십자가로 자신을 끌고 가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어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부인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믿음이다.


그것은 나 이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지가 믿음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때에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날 것이라고 하심을 상기해보면 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어떤 본성이 있느냐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근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생수가 넘치듯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말씀이 넘쳐나고, 죽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로 끌고 가는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며, 다시는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는 고백을 자아내는 영이 자기 안에 없으면 자신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에 속해 있다고 해도 소용 없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을까? 좁은 문은 큰 문과 좁은 문 두 선택을 마주하면 좁은 문, 근거도 없이 적은 사람이 가는 것을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많은 곳, 메뚜기 떼와 같은 중다함과 대중성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메뚜기 재앙은 다름이 아니라 대중성, 과반수와 같은 수의 논리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 가져오는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엘서가 말씀하는 메뚜기 재앙의 폐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서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대중성과 과반수와 같이 넓은 문 너머의 의는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한다는 것이 메뚜기 재앙의 본질적 의미인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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