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 오순절 vs. 바벨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24. 04:00 Writer : 김홍덕

(행 2장, 창 11장)


성령이 오시니 그렇게 갈등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은 한 순간에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원자요 그리스도라는 것의 증인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증인이란 증거와 하나가 된 사람이다. 자신들 안에 증거가 있는 증인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또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 믿었던 베드로와 제자들 자신이 낮아지는 낯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성령이 오신 날은 오순절이었다. 그렇다고 성령이 달력으로 오순절에 오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오순절보다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른다. 달력으로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이라는 날이지만 그 날이 매년 지나간다고 해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면 어차피 오순절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순절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날이 오순절이다.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수로 의미를 따진다면 5는 회복의 수다. 유월절 이후 50일째라는 오순절은 유월절의 의미가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봐도 좋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유월절이 가진 의미를 회복하는 일은 성령으로 인함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은 구속의 본질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만 지키던 유월절, 그리스도가 와서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키던 유월절이 아니라 애굽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살이하던 것을 그치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원래 자리로 회복되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이다. 우리 육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쓰시게 드리는 것이 온전한 희생이요 제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이 진정한 출애굽이고 구원이며 유월절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어 육신의 행동과 삶 모두가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 없이 되지 않는다. 성령이 오셔야만 한다. 이런 일이 개인의 심령에서 체휼 되어야 거듭난 생명임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니 기이한 일이 생겼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들이 여러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바벨탑을 쌓을 때는 방언이 여러 가지로 됨을 인하여 사람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니아,본도와 아시아, 브로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1:9-11)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바벨탑과 완전히 대비가 된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닿으려고 쌓은 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하게 여기시므로 사람들의 말을 다르게 하여 모두가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심을 인해서도 사람들이 각자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몰랐던 하나님의 큰일을 알아들었다. 


두 사건 모두 하나님이 사람들의 말을 다르게 했는데 바벨의 때에는 하나님께 이르려는 사람들은 흩어졌고, 오순절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인하여 서로 다른 방언을 말함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악하게 여기신 바벨의 때에는 서로 말이 달라져 알아듣지 못하므로 탑을 계속 쌓을 수 없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반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게 되었다. 말이 달랐다는 것은 같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마음은 위로 가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의롭고 선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세상의 높은 곳에 가야한다 생각는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다. 이 마음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이고 세상에서 이긴 자라 생각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호하던 마음이고, 예수님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마음이며, 제자들을 그렇게 곤고하게 만들었던 마음이며, 욥을 곤고하게 만든 마음이다.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자들의 말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처럼 항상 다르다. 말이 다르다는 것은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같은 것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생각이 다르니 말이 같아도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높아지려는 것도, 성공도, 하나님을 잘 믿는 것도 다르다. 높다는 말과 성공과 평안과 좋은 신앙이라는 말과 단어는 같지만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침례가 되고 세례가 되며 교단이 갈라진다. 세상의 다툼도 모두 이것 때문이다. 약간씩 추구하는 바가 같은 이들이 얼마간 모이도 하나 결론은 항상 자기가 옳다는 것에 수렴한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사람 수만큼 다른 말이 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에도 여러 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벨탑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여러 방언으로 말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다.”고 고백했다. 성령,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는 영이 임하여 여러 방언으로 말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말이 달라도 모두 알아듣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끼리 동일하게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앙망하면서도 그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달랐는데 성령이 오시니 유대인뿐 아니라 각 국의 모든 민족들이 다 자신들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일을 듣게 되고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요10:25)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또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데 성령이 오시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인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성령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게 하심도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고 믿게 되었다. 자신들의 상상과 기대 속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온전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이 그리스도가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임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성령이 오시면 나타나는 능력과 기적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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