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 그리스도와 성령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15. 12:26 Writer : 김홍덕

이 글()의 주제는 <낯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형상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조금만 솔직하게 생각해보면 성령에 대하여 많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들을 수 없고, 그나마 듣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예수를 열심히 믿게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 거의 전부다.

 

하지만 앞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주거나 행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 아니심을 설명했다. 성령의 기적이라면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아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시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본질적이고 가장 큰 기적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의 형성한 존재가 아니기에 자기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알 수 없는 절대적 어두움에 있는데 그것을 해소하고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것 이상의 기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 그래서 거듭남을 말씀하실 때 물과 성령으로거듭난다고 하신다. 물론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아니면 그것을 사람에게 알게 할 수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가진 생명 본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먼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시고 표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을 통해 보이셨다는 것이 예수님을 바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문장으로 표현해 놓고 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하게 한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존재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자칭)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성령을 논하기 전에 예수님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어두운 사람들일 뿐이다.

 

성령은 신앙에 있어 예수님을 바로 만나는 다음의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하고, 그 대가로 성경을 지키는 자기 행위를 드리는 장사하는 자들은 성령이 오실 바탕도 안 된 사람이다. 성령이 오시려면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는 자리로 가신 예수님이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이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가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라는 자기 믿음에 반함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하찮은 종의 값에 팔아 버렸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오늘날 자칭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가룟 유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성령의 능력을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종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종의 값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린 것이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으로 잉태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온전히 자기 심령에 심겨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 심령에 하나님이 뿌리신 씨고 성령은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다는 말씀에 매우 혼란스러워 했지만 그들 속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아주 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 사람이었음에도 그 분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심겨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려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성령이 오실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누가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바른 순종이 있는 사람에게 오시는 분이다. 이것은 성령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가진 베드로였기에 갈등은 있었지만 성령은 오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겪은 갈등의 필연성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갈등을 겪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갈등은 겪는 이들에게는 심히 곤고한 고난이지만 이것은 마치 출산의 고통 같아서 겪지 않고 온전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과정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듯 세상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제자들이 마주했던 낯선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 고난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심판이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신앙을 가진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는 큰 심판의 말씀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이것의 심각성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자신 안에 있는 사람이 마주한 생경한 세상과 예수님을 인하여 곤고한 이들에게는 정말로 소망의 말씀이 될 것이다.

 

알고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의 많은 선지자와 사도바울과 같은 사도들도 이 심한 고난의 시간을 다 지났다.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심판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자신이 행위로 심판 받는 세상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욥이 그랬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 왜 악이 관영한지 알 수 없었던 많은 선지자들이 그랬으며, 하나님 아들이 왜 십자가를 져야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당연했고, 자기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건만 자신은 왜 세상과 죄의 법 아래 있는지 너무 곤고했던 바울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같이 큰 변화를 보여주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아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는 고백을 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듯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신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 할 것이라고 했고, 제자들은 오순절이 지나자 돌변하여 그렇게 낯설었던 예수님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낮은 자리로 갔고, 바울 사도도 오히려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이 다스리는 세상에 속했다는 것이 자신이 정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쁘게 전했다.

 

이런 모든 변화가 바로 성령의 일이다. 그리고 성경이 이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난 다음에 그것이 자기 생명이 괴도록 성령이 역사하시기 전 힘든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제자들과 성경의 선진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바로 보이지 않는다. 욥의 고난이 대표적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관점에서 욥기를 보면 욥의 고난 끝에 온 몇 배의 축복에 주목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 위함인 관점에서 보면 욥의 모든 고난은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에 합당한 자격시험이고, 육신의 축복이 고난의 목적으로 둔갑한다. 또 베드로의 배신도 그냥 소심하고 비겁한 배신일 뿐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7, 8장에서 보여준 돌변하는 고백은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제자들과 신앙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그것을 이겨내게 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도 엄연히 존재하는 일일 뿐 아니라, 성령 충만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의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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