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귀신을 치유하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 야이로란 회당장이 엎드려 죽을 지경이 된 자기 딸의 구원을 청했다. 그의 청대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향했으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이는 죽었고, 이미 장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죽은 게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건 예수님이 보실 때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다.

 

예수님 앞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잠자는 존재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망 가운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셨다. 죄로 인하여 죽었으나 살리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앞에서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모두 자는 자와 같다. 야이로의 딸은 죄와 사망으로 죽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그뿐 아니다. 예수님께선 직접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바울 사도는 이를 두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모든 성도 역시 잠자는 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성경의 이런 맥락은 죽은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 앞에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자는 아이가 일어나듯 죄와 사망이 결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새롭고 거듭난 생명이 주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죄와 사망이 예수님 앞에선 자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기적에는 죽은 딸이 살아났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딸을 낳은 회당장 야이로다. 야이로는 회당은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의 장이라는 것과 그가 아들 아닌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오는 과정에서 혈루증으로 잉태치 못하는 여인을 고치신 일도 결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남자 여자 역시 육신의 성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사람은 육신의 성별과 무관하게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자 씨가 흙인 육신 안에 심겨 하나님 아들이란 거듭난 생명을 낳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것이 성별과 무관하게 육신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으면 남자, 형식만 있으면 여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가 그의 신부인 이유다. 성경의 행간을 알지 못하니 이슬람처럼 여성이 억압받기도 하고 반대로 어머니 하나님 같은 멍청한 말을 하는 이들도 생긴다.

 

성경 속 남자(아들)는 의를 가진 존재를, 여자(딸)는 의를 표현할 형식을 의미한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가 딸을 낳았다는 건 그의 회당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내용은 없고 예수님께서 외식이라고 하신 형식만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고, 거듭나게 하지 못하므로 죽은 신앙이다. 그 죽은 신앙이 그의 딸로 표현된 것이다.

 

회당장이 딸을 낳았다는 건, 말씀에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았다는 것

 

그러나 야이로는 자신의 그 상황을 알고 있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회당장이 길거리에서 왕도 제사장도 총독도 아닌 사람에게 엎드린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야이로는 자신에게 하나님 의가 없으며 자신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란 것을 예수님 앞에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이 딸을 살렸다. 그리고 그건 자기 신앙의 회복을 의미한다.

 

내용은 없고 외식만 남은 신앙은 죽은 것

 

잉태할 수 없는 여자인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잉태할 수 없는 질병인 혈루증을 고친 여인의 일 역시 야이로의 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간에 끼인 것 같지만 같은 일이고 하나의 말씀이다.

 

혈루증 여인과 사람을 하나님 아들로 거듭나게 하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회당의 장이지만 딸을 낳은 야이로 그리고 그마저도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고 죽은 딸은 모두 죄와 사망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우리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혈루증 여인, 야이로와 그의 딸의 모습과 상황이 예수님 만나기 전 나의 모습임을 발견해야 한다. 그 발견은 곧 예수님과 만났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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