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1-11) 향유옥합 - 2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4. 05:00 Writer : 김홍덕

세상의 왕


우선 사건은 여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향유가 들어 있는 작은 옥합(이스라엘 여인들이 결혼자금으로 모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는)을 깨뜨려서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다른 성경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었다는 것이 사건의 형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해져서 사건이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참관인들의 모습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모든 관심사였다. 그래서 이 여인의 모습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한가지였다. 그들은 그 비싼 향유를 무슨 이유로 이렇게 어이없게 허비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어이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 정도니 삼백 데나리온은 한 마디로 1년 연봉인데 그 많은 돈을 발에 쏟아 부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


그들이 놀라운 것은 어쩌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대척점으로 이동하신 것이 문제다. 그냥 두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고 어이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귀한 일이고 예수님의 일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일이 전해질 것이라고 하실 정도로 귀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발생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예수님의 생각 그 차이인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육신을 드리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이다.


향유를 그렇게 쓸 것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가진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든 선지자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그 누구라도 그들의 존재 이유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이다. 옥합 안에든 향유든 예수님의 능력이든 결국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변화산 사건 이후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맞서는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이긴 자’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에서 늘 보는 일이다. 아니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가서 듣는 설교가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 평안과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것 아닌가? 세상에서의 평안과 영광이라는 기준은 당연히 세상의 가치에 터 잡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평안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교회가 장사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에서 말하는 등 따시고 배부른 평안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볼모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엄연히 장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괜히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내신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믿어서 얻는 귀한 것이 세상의 평안과 성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가치관이 향유옥합을 팔아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가치관과 동일하게 세상의 기준에 의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일이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하심도 궤를 같이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향유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늘 있다. 향유옥합이 깨어지던 자리에도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도 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를 이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것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믿는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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