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제자와 가룟 유다의 차이, 11제자와 유대인들의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차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의 갈등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왜 저런가?”였다. “저 모습이 그리스도라고?”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 중에 있었다. 이것은 둘 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같아도 근원적으로 정말로 다른 세계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 잘 알았다. 심지어 자신들은 그 삶의 일부였다. 죄인과 창녀와 세리와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곁에 늘 그들이 있었다. 그런 제자들이 죄인과 창녀와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그 출신마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것과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가룟 유다 외에는 다 목욕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하신 근거도 이것이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다 밝아지지는 않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사람,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으면, 목욕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낮은 자리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과, 나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고,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먹는 예수,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 놓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엘리야’, ‘세례요한의 환생’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로 보았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만 본 적이다. 본질이 아니라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본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자신들의 소망이고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신적인 존재, 아니면 초능력을 가진 존재와 그 능력을 사모하고 그 힘을 빌어서 자신들도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소망이 나타난 것만 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난 세월동안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함께 먹고 마신 너희 제자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 배도 고프고, 화도 내며, 울기도 했던 인간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나를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신 이유다. 


베드로와 같이 제자들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데 어떤 그리스도인지,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가 열리는 일이 앞에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것이 유익이고,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베드로와 다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대부분이 가진 믿음은 세상에서 겪고 있고 도모하는 일들을 기도하면 더 뛰어난 결과를 낼 수 있는 그리스도다. 바로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은 엘리야요, 선지자요,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이 사람들의 기도에 함축되어 있다. 세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 기도와 소망을 이루어주심으로 나타난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은 사람이 상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전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믿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는 믿음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열렬히 환호 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임을 알았을 때 차라리 강도를 풀어 달라고 외친 이들의 가치관이고 믿음이다. TV에 나오는 사람을 대중이 안다고 그 사람이 대중을 아는 것이 아니듯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는 고사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는 환호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냥 죄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중한 병을 고쳐주고, 경제적 위기를 이겨내게 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육신의 문제를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더 나은 것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 예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 다들 그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린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도 여상하다. 성경에 있다는 것은 오늘도 물으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오늘도 물으신다는 것은 오늘도 답해야 한다는 의미고, 오늘도 누군가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엘리야, 선지나,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답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라고 답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고.

'주제별 성경 보기 > (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화산 - 2  (0) 2020.08.19
변화산 - 1  (0) 2020.08.1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1  (0) 2020.08.15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생각하다  (0) 2020.08.14
시작하며…  (0) 2020.08.13
,